2018~2019년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정상회담 때 통역을 맡았던 이연향 전 미국 국무부 통역국장은 26일(현지시간) “회담 분위기는 화기애애하고 좋았다”고 당시 상황을 전했다.
지난달 말 퇴임한 이 전 국장은 이날 워싱턴 특파원과 간담회를 갖고 “두 정상 모두 굉장히 솔직했다. 진정성 있게 대화를 해 보려고 노력했고 솔직한 분위기였다”며 이렇게 말했다. 이어 “트럼프 대통령이 ‘김 위원장과의 관계는 좋았다’고 하는 말은 맞는 얘기 같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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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 많이 듣기도…말 많은 분 아닌 듯”
이 전 국장은 당시 대화를 누가 주도했느냐는 물음에는 “한쪽이 (말을) 많이 했다는 기억은 없다”고 답했다. “트럼프 대통령이 많이 듣기도 했다. 트럼프 대통령이 그렇게 말이 많은 분은 아닌 것 같다”고도 했다.
이 전 국장은 2018년 6월 싱가포르 북ㆍ미 정상회담과 2019년 2월 베트남 하노이 북ㆍ미 정상회담, 그리고 같은 해 6월 판문점에서 성사된 ‘깜짝 회동’까지 트럼프 대통령 집권 1기 때 있었던 두 정상의 만남에서 모두 미국 측 통역사로 참여했다. 당시 두 정상과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대화를 전한 인물로 한국 국민에게도 친숙한 인사다.
버락 오바마 정부 때인 2009년 국무부에 통역관으로 입부한 이 전 국장은 16년 7개월간 재직하며 오바마 전 대통령, 조 바이든 대통령, 트럼프 대통령 등 미 최고위 인사들의 한국어 통역을 도맡았다. 굵직한 한ㆍ미 외교 현대사의 산 증인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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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딜 되고 안 되고는 또 다른 문제”
이 전 국장은 ‘노 딜’(합의 무산)로 끝난 하노이 회담 결과를 두고 “딜(합의)이 되고 안 되고는 두 정상만의 문제는 아니고 여러 가지 복합적 요소가 들어가야 하는 또 다른 문제”라며 “두 분(대화 분위기)은 괜찮았다”고 거듭 말했다. 특히 “두 정상은 어떻게 해서든지 해결을 해 보려는 생각도 있고 의지도 있었던 것 같다”며 “핵과 관련된 것 등 두 분이 결정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닌 것도 상당히 많았다”고 했다.
2018년 싱가포르에서 열린 첫 북ㆍ미 정상회담을 회고하면서는 “전 세계 관심이 집중된 회담이다 보니 두 정상도 긴장하고 저도 긴장됐지만 회담을 편안하고 긍정적이며 차분한 분위기로 만들려고 노력했다”며 “김 위원장이 사실상 처음으로 세계 무대에 나오는 것임을 알고 있어서 그런 생각을 했다”고 뒷얘기를 전했다. 또 “당시 김 위원장이 그렇게 대외 활동 경험이 많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굉장히 대처를 잘했다고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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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싱가포르 회담서 김정은 대처 잘했다”
북ㆍ미 정상회담에 통역사로 배석하게 된 경험은 자신에게도 상당히 큰 의미가 있었다는 이 전 국장은 “두 정상이 만날 거라는 예상을 거의 못 했다. 트럼프 대통령이니까 그런 발상의 전환을 해서 만날 수 있었던 것”이라고 말했다.
이 전 국장은 통역사로 일하면서 오바마 전 대통령과 트럼프 대통령 말을 통역할 때가 특히 힘들었다고 말했다. 변호사 출신인 오바마 전 대통령의 발언은 하나하나가 법률 문서 같았고 문장 하나가 한 문단일 만큼 길었던 적도 많았다고 했다. 이 전 국장은 “그런 것에 익숙했던 분이니까 말을 하면서도 혹 공격을 받을 소지가 있다 싶으면 (말을) 붙이고 또 붙여서 아이디어를 완성하는 식이었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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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바마 말, 법률문서…트럼프 생각 속도 빨라”
트럼프 대통령 화법 스타일을 두고는 “여러 가지 다양한 생각을 많이 하고 생각의 속도가 굉장히 빠르다”고 했다. 이 전 국장은 “이 얘기를 하다가 제3자가 보기엔 비약을 해서 다른 주제로 넘어가곤 하는데 그때마다 연결고리가 분명히 있다”며 “제가 통역을 할 때는 그 연결고리를 집어넣어 듣는 분 입장에서 의미를 알 수 있게 힘썼다”고 말했다.
통역 과정에서 곤혹스러웠던 경험으로는 2013년 당시 조 바이든 부통령이 방한해 박근혜 당시 대통령을 만난 자리에서 “미국의 반대편에 베팅하는 것은 좋은 베팅이었던 적이 없었다(It’s never been a good bet to bet against America)”고 말한 것을 한국어로 옮겼을 때를 꼽았다. 이 전 국장은 “바이든 전 대통령이 자주 쓰는 표현이었는데 뉘앙스 전달이 쉽지 않았다”며 “너무 강하게 ‘미국의 반대편에 서지 마라’ 이렇게 전할 수는 없어서 저 나름대로 수위를 낮춰서 통역했는데 바이든 부통령이 한국을 향해 ‘중국 편에 서지 말라’고 한 것으로 전해지면서 논란이 됐다. 외교부에서는 통역 잘못이라 해 화가 나고 자존심도 상했다”고 말했다.
다만 “24시간이 지나고서 ‘이것도 나의 역할’이라고 생각하면서 그냥 덮었다”고 회상했다. 정상 외교의 현장에서 통역사로 바라본 한ㆍ미 관계는 항상 굉장히 굳건하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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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년간 재직 국무부, 2월 말 퇴임
이 전 국장은 중학생 시절 이란 주재 한국대사관 무관으로 있던 부친(이재우ㆍ2019년 작고)을 따라 이란에서 살면서 영어를 익혔다. 한국으로 돌아와서는 연세대 성악과 졸업 후 결혼해 가정을 꾸리고 살다 친구의 권유로 우연히 한국외대 통ㆍ번역대학원에 진학한 뒤 통역사의 길을 걷게 됐다.
이 전 국장은 2009년 국무부 입부 이후 통역국장까지 올라 부 내에서 입지전적 인물로 통한다. 국무부 통역국장은 대통령과 국무장관을 비롯한 미 행정부 최고위 인사들의 외교 현장에서 통역과 번역을 총괄하며 70여 명의 정규직과 약 1000명의 계약직 통ㆍ번역 인력을 지휘하는 핵심 보직이다.
지난 2월 말 퇴임한 이 전 국장의 마지막 정상회담 통역 업무는 지난해 10월 한국 경주에서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를 계기로 열린 이재명 대통령과 트럼프 대통령 간 회담이었다. 이 전 국장의 퇴임식에는 국무부뿐만 아니라 백악관 인사들도 다수 참석해 성대하게 열렸고 트럼프 대통령 친필 서명이 들어간 감사 서한도 전달됐다.
이 전 국장은 트럼프 대통령과 김 위원장의 정상회담이 다시 열릴 경우 미국 측 통역은 국무부의 또 다른 한국어 통역사가 맡게 될 것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