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리카인물열전]⒀ '아프로비트' 창시자 펠라 쿠티…아프리카와 美음악 융합
나이지리아의 전설적 음악가이자 반체제 운동가…소잉카 사촌으로 한때 부인 27명
(서울=연합뉴스) 박성진 기자 = 세계 최고 권위의 음악 시상식으로 불리는 그래미 어워즈는 지난달 열린 시상식에서 휘트니 휴스턴, 폴 사이먼 등과 함께 약 30년 전 세상을 뜬 나이지리아 출신 뮤지션 펠라 쿠티(1938∼1997)에게 평생공로상을 수여했다.
아프리카와 미국 음악을 융합한 아프로비트(Afrobeat) 창시자이자 반체제 운동가인 쿠티가 사망한 지 29년 만이다. 1963년 그래미 어워즈에 평생공로상이 제정된 뒤 아프리카 음악가로는 첫 수상이다.
쿠티는 1938년 영국 식민지 나이지리아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성공회 목사이자 학교 교장이고, 어머니는 반식민주의 활동을 벌인 여성 운동가였다.
그의 두 형제 모두 이름난 의사이고 사촌은 1986년 아프리카 작가 최초로 노벨문학상을 받은 작가 월레 소잉카일 정도로 유명한 집안이었다.
쿠티는 엘리트 코스를 밟아 편안한 삶을 사는 대신 반정부, 사회 비판적 메시지를 담은 아프로비트 음악으로 군부 독재 정권과 대립하는 가시밭길을 걸어갔다.
어려서부터 피아노 등 악기 교육을 받은 그는 20세이던 1958년 영국 런던으로 건너가 트리니티 음악대학(Trinity College of Music)에서 클래식 음악을 공부했다. 바로크 음악의 양대 거장 바흐와 헨델을 가장 존경하고 좋아하는 음악가로 꼽을 만큼 서구 정통 음악의 기초를 탄탄히 다졌다.
이곳에서 밴드를 결성해 재즈와 서아프리카 음악 장르인 '하이라이프'(Highlife)를 결합한 곡을 연주했다.
런던 유학에서 다양한 스타일을 접한 다음 나이지리아로 돌아와 아프로비트 사운드를 본격적으로 심화시켰다.
그는 자신의 음악 스타일을 두고 나이지리아 요루바족 전통 음악과 하이라이프 등 서아프리카 전통 음악에 미국 재즈와 펑크, 솔(soul) 등을 융합한 아프로비트라고 표현했다.
그는 1969년 자신의 밴드와 함께 미국 로스앤젤레스로 건너가 10개월간 머무른 바 있다. 이 기간 미국의 급진적 흑인 단체인 '블랙팬서'가 벌이던 흑인 운동은 쿠티의 음악과 정치적 견해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사회 비판적인 가사, 타악기와 브라스(색소폰 등) 중심의 구성, 반복적인 리듬에 20∼30분에 이를 정도로 극단적으로 길게 이어지는 연주 스타일이 특징이다. 1960∼70년대 아프리카 음악계를 풍미했다.
쿠티는 밴드에서 노래뿐 아니라 색소폰, 키보드, 트럼펫, 전기 기타, 드럼 등 여러 악기도 직접 연주했다.
특히 1960년대 흑인민권운동이 거세던 미국 체류에서 돌아온 후 그의 음악의 주제는 사랑에서 사회적 이슈로 바뀌었다.
1970년 가족, 밴드 멤버 등과 함께 녹음 스튜디오, 무료 진료소 등을 갖춘 공동체를 설립했다. '칼라쿠타 공화국'(Kalakuta Republic)이라고 이름 붙이고 당시 군부 독재 정권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했다.
음악을 통해 부패한 나이지리아 집권층과 아프리카의 사회·경제적 불평등 문제를 비판했다.
이 때문에 집권층의 미움을 샀지만, 아프리카의 억눌리고 가난한 서민들은 그를 영웅으로 바라봤다.
쿠티와 그의 밴드 '아프리카 70'이 1976년 내놓은 앨범 '좀비'는 명령대로만 하는 나이지리아 군인을 좀비로 묘사하며 비판했다. 군부 정권은 이듬해 군인들을 보내 그를 폭행하고 공동체를 완전히 불태워 파괴했다.
쿠티도 거의 목숨을 잃을 정도로 두들겨 맞았다. 그의 어머니도 창문 밖으로 내던져져 크게 다친 뒤 숨졌다.
정권의 눈 밖에 났던 쿠티는 1984년 외환 밀반입 혐의로 20개월간 구속되는 고초를 겪기도 했다. 인권 단체 국제앰네스티는 혐의가 조작된 것이라면서 '양심수' 쿠티의 석방을 요구했다.
쿠티는 "음악은 영향을 미쳐야 한다"며 "당신이 곡을 연주하는 데 사람들이 아무것도 느끼지 못한다면 아무것도 안 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아프리카 음악의 본질"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나는 사람들이 춤추게 하고 싶지만 생각하게 만들고 싶다. 음악이 나쁜 삶에 맞서 더 나은 삶을 살도록 영향을 미치고 싶다"고 자신의 음악관을 설명했다.
쿠티는 1978년 여성 27명과 한꺼번에 결혼한 파격적인 개인사로도 유명하다.
이들은 대부분 그와 무대를 함께했던 가수와 백댄서 출신이다. 쿠티는 일부다처제에 대해 아프리카 전통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이러한 합동 결혼은 정부가 동료들을 매춘부로 몰아 구속하려는 시도에 맞서기 위한 방패막이였다고 항변했다.
그러나 이후 "남성이 여성의 몸을 소유해서는 안 된다"면서 가부장적 권위주의 체제를 부정하고 모든 부인과 이혼했다.
그는 58세인 1997년 에이즈 합병증으로 숨을 거뒀다.
쿠티는 '흑인 대통령'으로 불릴 정도로 아프리카에서 유명한 음악가였다. 그러나 생전 그의 아프로비트 음악은 미국과 유럽을 정복하지는 못했다.
그의 예술적 영향력은 사후에 세계적으로 확대됐다. 파란만장한 그의 생애를 다룬 뮤지컬 '펠라!'가 브로드웨이에 입성, 2010년 미국 공연계 최고 권위 토니상 3개 부문을 휩쓸었다.
또 그래미 어워즈 평생공로상 수상으로 그의 음악도 뒤늦게 아프리카를 넘어 미국에서도 진가를 인정받았다.
비틀스의 멤버였던 폴 매카트니는 1970년대 초반 나이지리아 수도 외곽에 있었던 쿠티의 클럽을 방문해 그의 음악을 들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음악이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굉장해 울었다. 그의 음악을 들은 것이 내 삶에서 제일 굉장했던 음악적인 순간 가운데 하나였다"라고 회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