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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전 이래 역사를 논문 주제로...말레이반도가 중심에 있었다 [왕겅우 회고록-청년기(8)]

중앙일보

2026.03.28 14:00 2026.03.28 1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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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부 Double Vision / 두 개의 전망
World of Learning / 학문의 세계로 들어서는 길

1949년부터 말라야대학에 다니는 3년 동안 내 인생을 무엇에 쓸지 확실한 생각이 없었다. 영어로 쓰는 말라야문학을 좀 생각해 보다가 제국주의 야욕의 배경인 자본주의에 대한 사회주의의 공격을 지지하는 반-식민 운동에 만족하고 지냈다. 학생회 일에 참여하면서 주변 세계를 조심스럽게 살펴볼 필요를 배우게 되었다. 그러나 정말로 내 흥미를 끄는 것이 사람들의 생활을 지배하는 조건들과 시간의 흐름에 따라 사건들이 펼쳐지는 과정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내가 현지 출생이 아니고 막 공산화된 중국에서 갓 돌아온 사람이라는 사실을 늘 의식했다. 비상사태가 고조된 상황에서 중-소 동맹이 연일 신문 지면에 오르는 가운데 중국의 한국전쟁 참전 소식까지 들으며, 정치활동에 관여하지 않는 것이 현명한 태도였다. 우리 역사 강의는 서양의 흥기와 아시아에 대한 지배력 확보 등 거대한 질문들만 다뤘다. 말레이반도나 세 곳 해협식민지처럼 미세한 대상들은 캔버스 가장자리에 보일 듯 말 듯 어렴풋하게 그려졌다.

제국을 통한 이 거시적 시각이 지역의 변화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중요한 배경을 실제로 제공한다는 사실을 3학년이 되어서야 깨닫게 되었다. 예를 들어 말라카와 조호르의 패권을 끝낸 것이 무엇이었고, 페낭의 프랜시스 라이트와 케다 술탄의 관계는 어떤 것이었는가? 영국과 네덜란드의 경쟁은 싱가포르의 발전에 어떤 작용을 했는가? 그리고 팡코르 조약의 전과 후에 페락에서는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

허술한 공부였지만, 장거리 교역과 팽창 중심의 유럽 관점에서 이런 질문들을 바라보는 데 유리한 점이 있었다. 지역의 가장 강력한 세력들이 멀리서 온 세력에게 압도당하는 장면에서 찾을 수 있는 교훈이 있었다. 막강한 해군력 앞에 동남아시아 국가들이 드러낸 허약한 모습을 살필 수 있었다. 제국 건설자들의 동기가 무엇이었는지, 지역 사람들이 어떤 반응을 보였는지, 그리고 적절한 대응을 가로막은 지역 전통의 역할이 어떤 것이었는지, 많은 질문이 떠올랐다.

파킨슨 교수의 공개강연이 내 선택의 결정적 요소가 되었다. 개인과 집단이 역사 전개에 작용하는 방식의 묘사가 흥미로웠다. 오늘의 일에 대한 과거의 역할을 거듭해서 지적하는 것도 인상 깊었다. 역사 공부를 선택하면서 내 인생의 여러 측면이 얼마나 많은 과거의 영향을 받는지도 깨닫게 되었다. 어머니의 삶과 우리 집안의 내력에 관한 그분의 설명 위에 내 언어 교육을 중국 고전으로 시작하려는 아버지의 의지가 겹쳐졌다.

1학년 역사 강의는 우리를 이집트와 바빌론, 모헨조-다로, 예루살렘, 아테네와 로마, 장안(長安), 카라코룸과 사마르칸드로 돌려보냈다. 2학년 강의는 포르투갈과 스페인 선원들이 열고 근대 서양을 우리 지역에 불러온 세계사로 그 뒤를 이었다. 사건 전개에서 인과관계의 느낌을 강조하는 선형적(線形的) 시간의 흐름이 새로운 요소였다. 선형적 시간관 역시 인위적인 것이지만 내가 익숙하던 중국사의 순환적 시간관을 잘 보완해 주었다. 3학년 때 19-20세기로 들어와 산업혁명과 자본주의경제의 효과를 배우면서는 진보에 대한 영국인의 믿음에 의한 인도의 변화가 불가피한 일이었음을 이해하게 되었다.

결국 이 강의들은 파킨슨 교수에게 배우기 위한 준비였다. 그분은 우리 반 열 명 학생에게 1만 단어 짜리 “학문 연습”을 쓰면서 원사료 이용 방법을 익히게 했다. 문서자료에 2차자료와 구전자료를 더해 지역 역사를 그려내도록 이끌어주었다.

20세기로 넘어올 무렵 해협식민지의 중국인 개혁가와 혁명가들에 관해 읽은 적이 있어서 그들의 움직임을 보고한 문서를 찾아보기 시작했다. 남양 등지에서 쑨원과 그 추종자들에 관해 출판된 자료가 많았다. 이 주제를 신청하고 필요한 작업 내용을 정리했다. 파킨슨 교수는 격려를 마지않으며 자료 조사를 위한 홍콩 출장을 지원해 주겠다고 했다.

파킨슨 교수는 제국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보수주의자임을 감추지 않았으나 제국의 역할을 설명하는 데 유머를 곁들였고, 존 로크나 존 스튜어트 밀이 제창한 자유주의의 옹호자이기도 했다. 평등과 자유에 관한 내 글 하나를 짚어, 내가 스스로 생각하는 것만큼 사회주의자가 아니고 자유주의자에 가까운 주장을 한다고 하신 일이 아직도 기억난다. 적어도 내가 보기에는 그분도 자유주의자였다. 홍콩 출장비 지원만이 아니라 내 박사과정을 위해 영국문화원 장학금을 따 주신 것을 봐도 그렇다.

홍콩에서 지낸 4주일 동안 배운 것도 많고, 최근 중국혁명의 숱한 흔적에도 접하게 되었다. 그 도시는 민족주의와 공산주의 양쪽 정치활동의 중심축이었다. 장제스의 타이완에서도 마오쩌둥의 대륙에서도 살고 싶지 않은 많은 학자들이 그 특이한 종류의 식민지에 모여들었다. 너무 많은 역사가 그곳에서 만들어졌고, 또 만들어지고 있어서 나는 구할 수 있는 자료를 읽고 캉여우웨이나 쑨원의 기억을 가진 사람들을 찾아보기 바빠 눈코 뜰 새 없었다.

나는 쑨원보다 덜 알려진 캉여우웨이에 관해 공부하고 1898년 이후 망명기의 모습을 알아내는 데 제일 관심이 컸다. 다행히 찾아낸 캉의 제자 우셴즈(伍憲子)가 나를 만나줬다. 카리스마 넘치는 쑨원을 받드는 국민당 쪽에서는 캉을 보수꼴통 보황(保皇)주의자로 깔보았기 때문에 쑨원에 관한 자료는 넘쳐나는 반면 캉여우웨이에 관심을 둔 사람은 극히 적었다. 우셴즈가 싱가포르와 페낭에서 캉의 활동에 관해 아는 것을 적어주었고 그 기록은 캉여우웨이의 활동에 관해 알려진 내용의 빈틈을 많이 채워주었다. 이 기록을 내 학위논문에 부록으로 붙였다.

옛 기록을 쫓아다니는 것 외에 다른 소득도 있었다. 내가 중시하는 거작 〈국사대강(國史大綱)〉의 저자 첸무(錢穆)를 만난 것이 가장 큰 일이었다. 왕조 통치력의 강약에 관한 첸 선생 책도 막 읽은 참이라 그를 만나 송대 이후 황제들을 박하게 평가하는 이유 등을 물을 수 있어서 기뻤다.

첸 선생이 막 세운 신아서원(新亞書院)에서 만났다. 사무실, 응접실, 침실로 겸해 쓰고 구석에 주방기구까지 갖춘 방이었다. 내가 알아듣기 좀 힘든 우시(無錫) 말씨의 국어로 중국 역사를 개관하면서 과거와 현대의 통치 실패 사례를 짚어주었다. 내가 중국사 연구자가 아닌데도, 외부인의 시각에서 중국사를 연구할 것을 진지하게 권해주었다. 전통적 역사가가 현대 서양 학술을 받아들이는 방법, 그리고 정치와 이념이 학문의 세계를 휩쓰는 가운데 소외된 위치를 선택하는 많은 중국인 학자들이 처한 상황에 처음으로 눈뜬 자리였다.

앞서 필리핀, 실론, 인도 방문과 마찬가지로 홍콩 여행도 내 생각과 진로에 오래가는 영향을 끼쳤다. 필리핀 여행에서는 현지 문화에 대한 가톨릭의 깊은 영향과 미국의 이종교배가 품은 딜레마를 보았다. 실론 여행에서는 인도에서 출발해 널리 퍼진 불교가 실론에 살아남은 모습을 보았다. 인도에서는 그 나라를 빚어낼 영감이 넘치는 “인도의 발견” 이야기를 델리 친구들에게 들으며 감동받았다. 이제 홍콩에서는 국경에 얽매이지 않고 중국을 마음껏 찬양도 하고 비판도 할 자기 나라로 여기는 중국인의 영역에 다시 들어갈 길을 찾은 것이다.

새 중국의 존재가 지역의 많은 변화에 영향을 늘리고 있었다. 2년 된 한국전쟁 덕분에 타이완과 홍콩에 대한 압력이 줄어 수십만 중국인이 상황 적응을 위한 정치적-심리적 여유를 가질 수 있었다. 1947년 상하이와 난징에 갔을 때 절망적 불안감의 분위기와 반대로, 이제 홍콩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사람들의 표정에서는 희망과 기대감을 느낄 수 있었다. 역사 공부가 현재에 대한 이해를 늘려주리라는 생각이 굳어졌다.



Distant History / 아득한 시대의 역사

1953년의 졸업논문에서 20세기 초기를 놔두고 2천 년 전 이래의 남해(南海) 교역으로 건너간 이유를 친구들에게 설명하기가 쉽지 않았다. 1천 년 넘는 기간의 역사를 담는 논문을 쓴 이유도 설명이 필요했다.

강사로 임명받고 논문 주제를 찾다 보니 중국 어느 곳의 문서고도 이용할 수 없다는 사실이 분명해졌다. 현대사를 연구하려면 서양과 일본 자료에 주로 의지해야 할 형편이었다. 올바른 길 같지 않았다. 그런데 중국사를 연구하려는 마음은 간절했으므로 중국 자료가 넉넉히 있는 근대 이전 시기에서 주제를 찾기 시작한 것이다.

인도양 방면에서 발원한 문명 유적에 중국 교역으로 들어온 문물이 뒤얽히는 충돌의 현장이 내 마음을 끌었다. 여러 종류 사료의 활용 방법을 배울 수 있는 길일 뿐 아니라 말레이반도가 한가운데 놓여 있는 이 지역을 더 많이 알게 되는 길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고국으로 삼으려는 나라를 더 잘 알 수 있는 길이라는 생각이 이 주제에 매력을 더했다.

교역의 역사에 관해 읽는 중에 계시의 순간을 만났다. 남해 교역의 또 하나 실마리를 잡은 순간이다. 법현(法顯)의 〈불국기(佛國記)〉를 읽으며 5세기에 그가 인도 여러 곳과 스리랑카를 여행한 사실이 신기하게 생각되었다.

승려들의 구법 여행에 입문한 후 그 250년 후 현장(玄奘)법사의 중앙아시아 경유 왕복 여행, 그리고 의정(義淨) 등 해로를 통한 승려들의 여행에 관해 읽게 되었다. 교역에 직접 관계된 활동은 아니라도 중국과 한국, 그리고 베트남의 승려들이 수백 년간 바닷길로 여행한 사실에서 남부 중국과 동남아시아 사이의 상선 활동이 얼마나 활발했는지 알아볼 수 있다.

지도교수인 파킨슨 교수에게 이 교역을 논문 주제로 하고 싶다고 말했다. 이야기의 꼭대기로 올라갔다가 논문 제출까지 주어진 1년 동안 내려올 수 있는 데까지 내려오겠다는 계획이었다. 교수님은 눈도 한 번 깜빡이지 않고 듣는 것이, 내가 알아서 해낼 일로 생각하는 기색이었다. 마침내 그해 8월에 논문을 끝냈을 때 그분은 제출 전에 자기 확인이 필요 없다는 말씀을 남겨두고 휴가 중이었다. 그 시절에는 일이 그렇게 쉬웠다.

중국의 남해 교역이 시작된 것은 기원전 3세기 말 진 시황이 낙월(駱越) 부족들을(지금의 광시성 남부와 베트남 북부) 정복하러 군대를 보냈을 때였다. 진 제국 멸망 후 남방에 파견되어 있던 장군들이 남월 왕국을 세워 해상교역을 근거로 번영을 누린 최초의 중국인 국가가 되었다. 백년 후 한 무제가 남월을 정복하고 남해 방면의 교역을 벌이던 항구들을 장악했다.

이 교역의 초기 성장을 가장 크게 뒷받침해 준 것이 중국 남해안의 한족 인구 증가였다. 북방의 수많은 전쟁이 많은 인구를 남쪽으로 몰아 보냈고, 한나라 멸망 후에는 다른 이유들로 인해 인구의 남방 이동이 계속되었다. 시간이 지나며 이주민들이 월족(越族) 원주민을 동화시켰고 능력 있는 사람들은 남중국해 건너편에서 온 상인들과 경쟁에 나셨다.

전쟁, 교역, 종교와 이주 등 엇갈린 몇 가닥 갈래를 풀어내야 했다. 북방을 일련의 유목민 왕조들이 지배하는 3백년 동안 남쪽으로 쫓겨온 강력한 한족 가문들이 세운 남방 왕조들은 남중국해의 정치조직들에 깊은 겅제적 관심을 가지고 몇 차례 원정대를 보냈다. 현지의 자체 기록이 없는 지역들에 관한 정보를 얻는 데 그 기록이 특히 중요하다.

이 시기 내내 나는 역사학도 입장에서 사료를 대하고 있었으나, 내가 새로운 분야에 들어서고 있다는 사실을 곧 깨달았다. 한학(漢學)이라 불리는 이 분야에서는 중국과 일본의 고전 연구 전통에 유럽의 학술이 합쳐진 연구 방법이 쓰였다. 16세기 말에서 18세기까지 예수회 선교사들의 작업에서 그 기원을 찾을 수 있다. 18세기 계몽주의 사상가들의 중국 관심이 늘어나면서 프랑스와 독일 학자들이 문헌학 중심으로 발생한 중국학을 문학과 역사 연구의 넓은 범위로 넓혔다.

한학(漢學)의 배경이 없다는 내 핸디캡은 어쩔 수 없었다. 아버지가 중국의 고전 시문과 산문을 가르쳐준 것은 그분 자신의 문헌학 사랑 때문이었고, 나를 훈련까지 해주지는 않았다. 그분에게나 1947-48년 난징의 선생님들에게나 배운 것은 문학에 국한된 범위였다.

역사학 방법론을 조금이나마 익힌 것은 영국인 교수들을 통해서였는데, 그분들 관심은 현대사에 주로 있어서 중국사 이야기는 없었다. 그래서 나는 서유럽 역사에서 배운 방법을 중국 문헌자료에 적용할 시도를 하게 되었는데, 그 방법의 출처도 모르고 내가 다룰 방대한 관찬 자료가 선택되고 편집된 기준도 모르는 채로였다.

자가학습 방식의 “수련”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모든 것이 새로웠고, 신명나는 한 해이기는 했지만, 무척 힘이 들었고 과연 시간 내에 논문을 끝낼 수 있을지 늘 불안했다. 마거릿의 격려에 관해서는 나중에 더 쓸 텐데, 런던에서 공부할 장학금을 받을 자격을 갖추려고 낑낑대는 동안 초점을 놓치는 일이 없도록 많은 도움을 주었다. 마거릿과 그 어머니를 안심시켜 1954년 8월의 내 출발 전에 약혼식을 올리도록 동의를 얻는 것도 내 할 일이었다.

파킨슨 교수가 내 가능성을 인정해주고 작업 환경의 온갖 문제에 적응해 내는 능력을 높이 평가해준 것이 다행이었다. 영국 유학을 권해준 것도 그분이었다. 부모님에게는 나를 그리 보낼 능력이 없었다. 교수님은 2년간의 영국문화원 장학생으로 추천해주었다. 박사과정에는 최소 3년의 기간이 필요했는데, 일단 런던에 가 있으면 길이 생기리라는 것이 그분 생각이었다. 나는 영국으로 갈 마음의 준비를 했다.



김기협([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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