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부인과 전문의 A씨는 그날 밤을 잊지 못한다. 최근 10대 여학생이 극심한 하혈로 응급실에 실려 왔다. SNS에서 구입한 임신중지 약을 혼자 삼켰다고 했다. 성분도, 용량도 알지 못했다. 불완전 유산으로 과다출혈이 생겼다. A씨는 “그나마 병원에 빨리 와서 다행이었다”고 했다.
그 소녀에게 필요했던 건 안전하게 처방받고, 의사의 안내 아래 복용할 수 있는 합법적인 임신중지약이었다. 그러나 한국에는 그런 선택지가 없다.
임신중지약은 임신 초기 자궁 수축을 유도해 임신을 중지시키는 약이다. 세계보건기구(WHO)가 필수의약품으로 지정했고, 미국·일본을 비롯한 90여 개국에서 전문의 처방 아래 사용하고 있다. 부작용도 있다. 임신 주수가 늘수록 위험도 커진다. 심한 출혈로 생명이 위험할 수 있다. 그래서 더더욱 이 약은 음지가 아니라 의료 체계 안에 있어야 한다.
2019년 헌법재판소가 낙태죄에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린 뒤 7년이 흘렀다. 그러나 제도는 아직도 공백 상태다. 제도가 없다고 임신중지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사라지는 건 안전이다. 지난해 적발된 임신중지 약물 온라인 불법 유통 사례는 682건, 최근 5년 누적은 2971건이다. 숫자 뒤에는 기록되지 않은 위험이 있다. 지금도 성분도 모른 채 약을 삼키고, 이상 증상이 생겨도 어디에 도움을 청해야 할지 모르는 여성들이 있다.
더 심각한 것은 책임져야 할 기관의 태도다. 식품의약품안전처는 임신중지 허용 주수가 법률에 명시돼야 심사가 가능하다는 입장을 되풀이해왔다. 하지만 식약처가 직접 의뢰한 외부 법률자문에서는, 모자보건법 개정과 무관하게 현행 약사법 체계 안에서도 품목허가가 가능하다는 의견이 제시됐다. 스스로 받아본 자문 결과조차 외면한 채, 식약처가 기다리는 것이 무엇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이재명 대통령도 지난해 12월 업무보고에서 이 문제를 두고 “숙고를 몇 년째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고 질타했다. 그런데도 달라진 건 없다. 이것을 과연 신중함이라고 봐야 할까. 오히려 여성의 건강과 안전을 두고 책임 있는 결정을 미뤄온 행정의 무책임에 더 가깝다고 본다.
임신중지를 둘러싼 논쟁은 계속된다. 찬성과 반대, 종교와 윤리, 생명과 자기결정권이 충돌하는 자리도 있을 것이다. 그 논쟁 자체를 막을 수는 없다. 그러나 제도 공백 속에서 여성들은 계속 위험에 노출되고 있다. 국가가 해야 할 일은 논쟁이 끝날 때까지 기다리는 게 아니다. 여성이 목숨을 걸지 않아도 되도록, 최소한의 안전장치를 마련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