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지않아 회고록을 쓴 사람과 안 쓴 사람으로 나눠질지 모른다. 쓴 사람의 삶은 AI에 의하여 불멸의 기록으로 남을 것이고, 안 쓴 사람의 기억은 시간과 함께 사라질 수 있다. 언론이 유명인의 회고록에만 관심을 두어서 그렇지 수많은 보통사람들이 회고록을 쓰고 있고 도서관과 구청, 그리고 AI가 도우미 역할을 한다. 국민의 절반이 회고록을 쓰기까지 책을 내겠다면서 ‘이분의일’이란 이름을 단 출판사도 있다. 이번 지방선거에서 “회고록 쓰기를 도와드립니다”는 공약도 나와야 할 정도로 조용한 붐이 일고 있다.
지난 3월 24일 한국프레스센터에서 ‘전(全) 국민 회고록 쓰기 운동’ 출범식이 있었다. 50명의 발기인으로 구성된 ‘회고 네트워크’는 큰 포부를 밝혔다. 5000만 국민의 경험과 지혜, 노하우가 쌓이면 미래 세대에 거대한 ‘지적(知的) 유산’을 넘길 수 있다는 것이었다. ‘대한민국 국민 모두가 자기 삶의 주인공이 되는 21세기 팔만대장경’ 운동이라고도 했다.
이들이 만든 온라인 플렛폼 ‘memorynetwork.org’에 접속하면 “우리는 잊혀지기 위해 태어나지 않았다”라는 문장이 가슴을 친다. “알고리즘이 당신의 삶을 정의(定義)하기 전에, 먼저 스스로 써야 합니다”는 문장은 AI시대의 독립선언처럼 들린다.
50명의 발기인 명단도 공개되어 있다. 대학생, 사진 작가, 웹툰 작가, 자동차 디자이너, 출판 편집장, 교수, 도서관 직원, AI전문가 등 다양하다. 출범식에서 강북청소년문화정보도서관의 전성동 주임은 지난해 7월부터 진행한 ‘아무튼, 아모르파티’ 프로그램을 소개했다. 글을 써본 경험이 없는 8명의 노인들이 도서관에 상주하는 작가의 지원을 받아 회고록을 쓴 사례였다. 가족을 초대해 진행한 출판기념회는 눈물바다였다고 한다. “기록을 통해 자신의 삶을 긍정하게 되었고 치유의 시간이 되었다”고 했다.
‘퍼플넷’의 김상아 대표는 "직장인의 ‘일 경험’이 퇴사와 동시에 사라지는 현실이 안타깝다"며 ‘일 기록’을 AI데이터로 남기는 작업을 하고 있다. 그는 “퇴직하는 전문가들은 성실히 바쁘게만 살아와서 기록을 남기지 못하고 있다”면서 “이들의 전문적 지식과 경험, 노하우가 디지털 자산이 되고 사회적 자산으로 유통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했다.
레페토AI의 이대범 대표는 부모 인터뷰를 기록으로 남기는 과정에서 개발한 AI 프로그램을 회고록 출판에 활용한 사례를 소개했다. 기록에 서툰 노인들의 구술을 받아 AI 프로그램을 이용해 텍스트로 전환하고, 이를 자연스럽게 문학적으로 수정하는 과정을 소개했다. 그는 이 프로그램을 이용해 200여 명의 회고록을 출판했다.
AI 도움 받아 회고록 쓰기 붐 세계 최고·최대 데이터 베이스 한국인의 존재 증명이자 보고서 사람은 기억되기 위해 태어난다
이날 발표된 선언문은 “기록은 ‘나’를 찾는 일이다”라고 시작한다. 회고록 쓰기는 AI시대에 인간다움을 지키는 최후의 보루라고 했다. “고립된 개인이 기록을 통해 연결될 때, 아무도 모르게 홀로 맞는 마지막과 서서히 지워지는 기억을 함께 붙들어줄 수 있으며, 세대 간의 지혜를 전수하는 건강한 공동체로 거듭난다”고도 했다.
이들은 AI를 ‘전 국민 회고록 쓰기 운동’의 동반자로 삼으며 동시에 AI를 가르치면서 써먹겠다는 자세이다. “우리는 기록을 통해 AI에게 이웃의 온기(溫氣)와 공동체의 연대를 먼저 학습시킬 것이다”고 했다. 한국인만 쓸 수 있는 압도적 양과 질의 회고록을 통하여 더 널리, 깊게, 따뜻하게 소통함으로써 “소버린 AI를 강화, ‘데이터 주권’을 확립한다”는 대목은 작게 시작한 모임이지만 장대한 비전을 갖고 있음을 내비쳤다.
선언문은 “유명인의 연대기만이 역사가 아니라, 시장 상인의 하루, 학교를 돌보는 선생님의 삶, 난민 아이의 이야기가 모여 비로소 온전한 시대의 초상이 완성된다”고 했다.
지난 80년의 한국 현대사는 수천 년 인류 역사를 압축적으로 거친 역전 드라마인데 다행히 좋은 결말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 이 역사 만들기에 참여했던 사람들, 고위직과 전문가들뿐 아니라 보통사람들이 생생한 체험기를 남기고 국가가 이런 기록을 모아서 활용 가능하도록 하면 수많은 파생 상품이 생길 것이다.
가장 위대한 이야기로 일컬어지는 한국 현대사의 집단 체험이 AI 데이터 베이스로 모이면 정책, 영화, 소설, 논문 소재, 어떤 원리나 교훈이 될 수 있다. 더 나아가 개발도상국이 활용할 수 있는 수많은 성공 사례들, 무엇보다도 세계 사람들에게 “한국인은 이렇게 살았다”는 존재 증명이 될 것이다.
새마을운동, 서울올림픽운동을 잇는 성공적 국민운동을 예감한다. ‘전 국민 회고록’은 1945년 이후 대한민국에서 태어났던 약 1억 국민이 민족사에 바치는, “우리는 참 열심히 살았습니다”는 보고서일 것이다. 모든 사람은 기억되기 위하여 태어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