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리콘 부품을 자를 때 쓰는 절삭유부터 포장 비닐까지 수급이 심상치 않아요. 비축분이 당장 떨어진 건 아니지만, 납품업체 쪽에서 발주 물량의 20~30%가량은 차질이 생길 수 있다고 해서 공장도 사용 효율을 극대화하라고 지시했어요.” (국내 반도체 장비업체 관계자)
중동 지역의 무력 충돌이 유가 상승을 넘어 실물 경제의 전방위적 공급망 교란을 유발하고 있다. 특히 원가 비중이 높거나 대체재가 부족한 반도체·제약·항공산업을 중심으로 위기감이 고조되는 모양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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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르무즈에 갇힌 반도체…소부장 “절삭유·포장 비닐도 비상”
당장 발등에 불이 떨어진 곳은 재고 여력이 부족한 반도체 생태계 밑단이다. 원자재 수급난은 이미 중소 반도체 소부장(소재·부품·장비) 업계로 옮겨붙었다. 공정 전반에 쓰이는 기초 원·부자재가 배송 지연과 원가 상승에 노출되면서, 제조 생태계가 연쇄적인 타격을 입을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더 큰 뇌관도 도사리고 있다. 반도체 제조의 핵심축을 담당하는 필수 가스 공급망이다. 천연가스의 부산물인 헬륨은 웨이퍼 냉각과 온도 정밀제어 등 반도체 제조 공정의 필수 원료다. 하지만 중동 전쟁으로 카타르의 헬륨 생산이 중단되면서 전 세계 공급량의 3분의 1이 줄었다. 미국 뉴욕타임스는 지난 27일(현지시간) “전쟁 당시 헬륨 운송에 사용되는 특수 컨테이너 200여 개가 호르무즈 해협에 발이 묶였다. 이를 재배치하고 가스를 배송하는 데 몇 달이 걸릴 수 있다”고 지적했다. 이어 “헬륨 수입의 3분의 2를 카타르에 의존하고 있는 한국 반도체 제조업체가 특히 큰 타격을 입을 것”으로 내다봤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수개월 분의 비축량을 확보하고 있어 단기적 충격은 피했지만, 사태 장기화 시 생산 차질이 불가피하다. 업계 관계자는 “미국 등 수입선을 다변화하면서 상황을 지켜보고 있다”면서도 “수급 어려움으로 가격이 치솟으면 원가 부담이 커져 고민”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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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프타 수급 비상…수액백 공급망 위협
국제 유가 폭등은 제약업계의 필수 의료용품 수급 불안으로 번지고 있다. ‘산업의 쌀’이자 플라스틱의 기초 원료인 나프타 가격은 올해 초만 해도 t당 600달러 수준이었는데 최근 1100달러대로 두 배 가까이 치솟았다. 한국은 국내 나프타 수요의 45%를 수입에 의존하고 있고, 이 중 77%는 중동산이다.
나프타를 원료로 만드는 합성수지 공급이 막히면 병원 필수품인 ‘수액백’과 의약품 용기 생산이 마비된다. 유한양행 등 주요 제약사들은 일단 2~3개월 치 포장 자재를 확보하며 상황을 예의주시하고 있다. 국내 한 제약업체 관계자는 “수액(輸液)의 ‘수’는 물 수(水)가 아니라 ‘나를 수(輸)’다. 항암제 등 다른 약물을 환자에게 주입할 때에도 수액을 통해 투여하기 때문”이라며 “그만큼 필수 의약품이라 수액백 부족 사태가 현실화할 경우 국민 건강과 생명에 치명적일 수 있다”고 우려했다.
정부는 지난 27일 0시부터 국내에서 생산된 나프타는 기존 수출 계약 물량을 포함해 모든 수출을 전면 금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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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트유 폭등…날개 꺾인 항공업계
항공업계는 연료비 직격탄을 맞았다. 국제항공운송협회(IATA)가 집계한 지난 20일 기준 글로벌 주간 평균 항공유 가격은 배럴당 197달러로 한 달 전보다 105% 치솟았다. 수익성 방어에 한계가 온 항공사들은 결국 ‘운항 포기’라는 초강수를 꺼내 들었다.
진에어는 4월 4일부터 30일까지 인천발 괌·클라크·냐짱, 부산발 세부 등 8개 노선에서 왕복 기준 45편의 운항을 전면취소하기로 했다. 장거리 노선을 운항하는 에어프레미아 역시 4월부터 로스앤젤레스(LA) 노선 26편과 샌프란시스코 노선 8편 등 총 50편을 비운항 조치하며 뼈를 깎는 비용 절감에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