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국적 기업들이 과세 자료 제출에 협조하지 않거나, 핵심 자료를 임의로 삭제한 뒤 제출하는 방식으로 관세조사를 사실상 무력화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 내야 할 세금에 비해 과태료가 지나치게 낮다 보니 버티기에 들어가는 건데, 정부도 마땅한 대응 수단을 찾지 못하고 있다.
30일 박민규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관세청에서 제출받은 자료에 따르면 최근 5년간 수입업체의 자료 제출 지연으로 관세조사가 중지된 사례는 총 708건이다. 이 가운데 전체 수입 기업의 1.6%에 불과한 다국적 기업(글로벌 기업)이 427건(60.3%)에 달했다. 연도별로 보면 다국적 기업의 관세조사 중지 건수는 2021년 58건에서 지난해 104건으로 약 79% 급증했다.
박민규 의원실은 “글로벌 기업들이 과세 자료 제출에 협조하지 않거나 핵심 자료를 임의로 삭제한 채 제출하는 방식으로 관세조사를 사실상 무력화하고 있다는 의미”라고 설명했다. 실제로 한 다국적 기업 A사가 제출한 수입물품 관련 권리사용료 계약서를 보면 전체 내용의 80% 이상이 가려져 있어 사실상 내용을 확인하기 어려웠다.
이 같은 과세자료 제출 거부·방해 사례가 늘면서 관세 부과를 위한 조사 기간도 길어지는 추세다. 다국적 기업의 경우 2025년 기준 관세조사 종결까지 평균 104일이 소요돼 국내기업 평균 67일보다 약 1.6배 길었다.
기업들이 ‘버티기’에 나서는 건 제도의 허점 때문이다. 자료 제출 의무를 이행하지 않을 경우 과태료 등 제재를 받는데 상한은 5000만원에 불과하다. 반복 부과도 허용되지 않는다. 특수관계자 거래의 경우에도 2차 과태료를 포함한 상한이 3억원에 그친다. 다국적 기업 평균 추징세액인 35억9000만원과 비교하면 제재 수준이 현저히 낮다. 결국 자료 제출을 지연시키며 버티는 편이 기업에 더 유리한 구조다.
이는 조세소송에서 과세당국이 패소하는 사례로도 이어지고 있다. 불복 절차 이후 진행되는 조세소송 단계에서는 관세청의 국내기업 상대 패소율이 20.0%에 그쳤지만, 다국적 기업 상대 패소율은 48.3%로 국내 기업보다 두 배 이상 높았다.
관세조사 단계에서는 자료를 제출하지 않다가 재판에 이르러 자신들에게 유리한 자료만 선별적으로 제출하는 사례도 잇따르고 있다. 예컨대 항암제 등 의약품을 수입하는 B사는 관세조사 당시 실제 거래한 수입물품의 송품장이 없다며 자료를 제출하지 않았지만 소송 단계에서는 일부 물품의 송품장을 제출해 과세처분의 정당성을 약화시켰고, 결국 세관장이 일부 패소했다.
정부는 대안으로 관세 분야에도 국세와 같은 이행강제금 도입을 검토하고 있다. 이행강제금은 자료를 제출하지 않을 경우 하루 단위로 부과할 수 있다. 신고 금액의 1000분의 3 범위 혹은 1일 500만원 내에서 반복 부과가 가능하다.
박 의원은 “일부 수입 업체가 과태료만 내고 버티거나 자료 제출을 지연하는 방식으로 관세조사를 사실상 무력화하고 있으나 이에 대한 대응 수단이 없는 상황”이라며 “과세자료 제출에 불응하는 경우 국세청과 같이 이행강제금 제도를 도입하고, 조사 기한 내에 제출하지 않은 자료는 불복·소송 과정에서 증거로 활용할 수 없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