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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글씨엔 이야기가 있다…김진표의 아름다운 악필 대회

중앙일보

2026.03.30 0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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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파이롯트 대표이자 가수 김진표. [사진 한국파이롯트]
악필(惡筆). 잘 쓰지 못한 글씨다. 자랑스러움과는 거리가 먼 이 악필이 자랑거리가 되는 대회가 있다. 바로 지난 26일 시작한 ‘고함 악필 대회’다. ‘세상에 아름답지 않은 글씨는 없다’는 대회 슬로건에 따라 예쁘지 않아도 의미 있는 손글씨를 온라인으로 응모 받는 대회다.

이 대회는 필기구 유통사 한국파이롯트 대표이자 가수 김진표의 기획으로 만들어졌다. 외조부인 한국파이롯트 창업자 고(故) 고홍명 회장의 유지에 따라 ‘고홍명·함은숙 문화재단’을 설립하면서 내세운 첫 프로젝트다.

26일 시작한 ‘고함 악필 대회’ 포스터. [사진 한국파이롯트]
한국파이롯트의 역사는 1954년 고홍명 창업주가 세운 ‘신화사’로부터 시작된다. 일본 파이롯트 한국 총판으로 기술 제휴를 통해 1964년 한국 최초로 만년필을 생산하는 등 국내 필기구 산업을 개척했다.

남성 듀오 ‘패닉’으로 잘 알려진 김 대표는 지난 2015년 회사에 합류했다. 2016년 고 창업주의 타계 후 2017년부터 대표로 일하고 있다. 회사로 출근하며 가장 먼저 한 일은 기록을 살펴보는 일. 1980년대 후반 전성기를 찍고, 이후 필기구 시장의 하락세와 함께 긴 불황의 터널을 지나왔던 한국파이롯트와 할아버지의 흔적을 하나로 꿰어 정리했다.

김 대표는 “늘 기록하는 분이었기에 많은 자료가 남아 있었다”며 “거래처 서류는 물론 도면, 근무 일지, 팩스, 할아버지의 사적 편지나 일기 등을 살펴보면서 회사와 할아버지 관련 구체적인 일들까지도 모두 파악할 수 있었다”고 했다.

악필 대회 기획의 영감이 된 고홍명 창업주의 일기. [사진 한국파이롯트]
새삼 느낀 것이 바로 기록의 힘이다. “생전에는 어려워 대화도 제대로 나누지 못했던 할아버지를 돌아가신 후에야 더 잘 알게 된 것 같다”는 김 대표는 실제로 할아버지의 일기에 한 장 한 장 해설까지 붙인 10권의 파일을 보관하고 있다.

일기 마지막 장은 2015년 2월. 아흔의 할아버지는 흐트러진 글씨로 “오래간만에 日記(일기) 쓰려 하나 氣力(기력)이 떠러져서..”라며 일상의 기록을 이어갔다. 김 대표는 “젊은 시절 쓴 일기와는 글씨체부터 다른 이 기록에서 어떤 울림을 느꼈다”고 했다.

평생 필기구 사업에 매진한 할아버지의 이름을 딴 문화재단을 만들면서 달필이 아닌 악필 대회를 떠올린 배경이다. 김 대표는 “자연스러운 감정의 진폭을 담은 글씨가 더 와 닿을 수 있다는 취지를 담은 행사”라고 설명했다.

이번 악필 대회를 시작으로 고홍명·함은숙 문화재단은 앞으로도 ‘쓰기를 지지하는 재단’으로 활동을 이어간다. 쓰기와 기록에 관한 여러 창작자, 예술가를 지원하고 관련 문화 활동을 지속할 예정이다.

마지막으로 김 대표는 “인류가 사라질 때 마지막까지 남는 도구는 펜이 아닐까 생각한다. 중요한 계약에 서명하고, 연애편지를 쓰고, 자필 사과문을 적는 것처럼 쓰기는 나의 정체성을 글씨에 담는 일”이라고 말했다. 이번 고함 악필 대회의 응모는 내달 10일까지다.





유지연([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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