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배구 2025~26시즌 V리그 남자부 플레이오프(PO) 2차전이 열린 지난달 29일 서울 장충체육관. 이틀 전 1차전에서 세트스코어 2-0으로 앞서다 2-3으로 역전패한 우리카드는 이날도 먼저 두 세트를 따낸 뒤 3세트를 맥없이 내줬다. 우리카드는 이를 악물었다. 4세트 12-9로 앞선 우리카드는 13-9, 14-9로 연속 득점했다. 관중석의 한 팬이 '다시 천안(3차전 장소)까지 13점'이라고 적힌 스케치북 숫자를 12점, 11점으로 연달아 고쳤다. 우리카드는 23-19까지 앞서 2차전 승리, 즉 PO 승부를 원점으로 돌리기까지 2점만을 남겼다.
우리카드 한태준의 서브가 아웃되면서 점수는 3점 차로 좁혀졌다. 현대캐피탈 허수봉의 서브 차례. 강력한 서브에 리시브가 흔들린 우리카드는 아라우조의오픈 공격으로맞섰지만, 현대캐피탈 블로커에 가로막혔다. 계속된 허수봉 서브에서 현대캐피탈은 내리 3점을 더 뽑아 24-23으로 역전했다. 그중 2점은 서브에이스였다. 듀스가 길게 이어졌다. 결국 현대캐피탈이 41-39로 세트를 따내며 57분간의 혈투를 끝냈다. 상승세를 탄 현대캐피탈은 5세트마저 어렵지 않게 따내 세트스코어 3-2로 역전승하고 챔피언결정전에 진출했다.
허수봉은 '플레이오프의 지배자'로 부르기에 충분했다. 1차전에서도 탁월했지만, 2차전 4세트 역전 장면만으로도 그렇게 부를 만했다. 경기 후 필립블랑 현대캐피탈 감독마저 "보신 대로 허수봉이 극적인 순간을 만들었다"고 말했다. 숨은 진가는 허수봉을 더욱 빛나게 했다. 현대캐피탈은 PO 1, 2차전 초반에 레오를 향한 우리카드의 집요한 목적타 서브로 고전했다. 허수봉은 리베로와 함께 레오를 에워싸고 대신 리시브에 나섰다. 주장으로서 팀 분위기를 이끌어가는 것도 허수봉 몫이었다. 블랑 감독마저 포기하는 듯 보였던 2차전 4세트 막판, 더욱 화이팅하며 동료의 전의를 북돋웠다.
허수봉이 다음 달 2일 시작하는 챔피언결정전에서도 또 한 번 코트의 지배자를 꿈꾼다. 챔프전 상대 대한항공과는 여러모로 얽혀 각별하다. 2016년 신인 드래프트에서 전체 3순위로 대한항공에 뽑힌 허수봉은 곧바로 현대캐피탈에 트레이드됐다. 대한항공에는 같은 포지션(아웃사이드 히터)에 정지석, 김학민 등 국가대표급 선배가 즐비했다. 허수봉 데뷔 이후 현대캐피탈은 지난 시즌까지 5차례 챔프전에 진출했다. 상대는 한 번의 예외 없이 모두 대한항공이었다. 현대캐피탈과 대한항공은 나란히 V리그 통산 5회 우승으로 누구든 이번에 이기는 쪽이 한발 앞서가게 된다.
고교 졸업 후 프로에 직행한 허수봉은 병역(국군체육부대)을 마치고도 지난 2022~23시즌 직후 자유계약선수(FA)가 돼 현대캐피탈과 연봉 8억원에 계약했다. 이번 시즌 직후 두 번째 FA 자격을 얻는다. 현대캐피탈은 물론 거의 모든 팀이 '할 수만 있다면' 허수봉을 붙잡고 싶어한다. 이번 챔프전은 허수봉에게는 일종의 쇼케이스인 셈이다. FA와 관련해 허수봉은 "다른 팀 주축 선수나 친한 선수들로부터 자기 팀으로 오라는 얘기는 많이 듣는다"면서도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챔프전에 집중하겠다"고 말했다. 챔프전 전망과 관련해서는 "경기 감각은 무시할 수 없는 요소"라며 휴식기가 길었던 대한항공에 대한 자신감을 표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