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란전쟁으로 호르무즈해협이 봉쇄되면서 글로벌 공급망이 마비됐다. 에너지를 수입에 의존하고 있는 한국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성장률 전망치가 0.4%포인트 하락한 1.7%로 수정되며 영국에 이어 두 번째로 큰 타격을 입었다. 반도체 등 에너지 집약형 제조업에 의존하는 한국의 구조적 취약성이 여실히 드러난 셈이다. 차량 5부제 같은 단기 처방을 넘어, 이번 전쟁을 계기로 에너지 안보의 근본 틀을 재편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에너지 지정학이 던진 이 중대한 과제를 어떻게 풀어야 할지를 관련 분야 전문가들에게 듣는 긴급 토론회를 고려대 일민국제관계연구원과 함께 마련했다. 박소영 논설위원이 진행한 토론에는 이재승 고려대 일민국제관계연구원장과 정용헌 전 아주대 국제대학원 교수, 김진수 한양대 자원환경공학과 교수가 참석했다.
호르무즈충격 한국경제 취약성
산업 셧다운 막을 공급망 구축
민간 주도 생태계로 체질 개선
원전 등 조합 에너지믹스 재편
Q : 에너지 위기의 관점에서 이란 사태를 평가해달라.
A : 이재승(고려대 일민국제관계연구원장)=우리는 지난 10여연간 소위 ‘에너지의 태평성대’를 누려왔다. 2010년대 중반부터 공급증가로 시장이 가격을 주도하면서 지정학적 요인에 의한 변동성이 상대적으로 낮았기 때문이다. 우리가 방심하는 사이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 이어 이란 사태로 ‘호르무즈 봉쇄’라는 블랙스완이 현실화됐다. 에너지 지정학은 이제 가격 문제를 넘어 생존의 문제가 됐다.
A : 정용헌(전 아주대 교수)=우리나라도 대비를 전혀 안 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지진’급 위기를 완벽히 극복할 만큼의 대비는 비용 문제로 누구도 하지 못한다. 불행하게도 이번엔 단순한 태풍이 아니라 지진이 왔다. 70년대 이후 반복된 위기와 이번 사태는 결이 다르다. 과거가 단순한 ‘물량 확보’의 문제였다면, 지금은 공급망 자체의 병목현상이 발생했다.
A : 김진수(한양대 자원공학과 교수)=산업에 미치는 치명적 영향을 따져봐야 한다. 우리나라는 수송용 원유보다 산업 현장에서 쓰이는 에너지양이 압도적으로 많다. 에너지 가격 상승은 곧 산업 경쟁력 약화와 국가 경제 붕괴로 직결된다. 특히 천연가스 위기는 전력 요금으로 전가돼 제조업 전체의 생산 원가를 압박한다. 전력 생산을 위한 가스 공급망에 차질이 생기면 반도체 등 초정밀 공정이 필수적인 우리 주력 산업은 단 한 순간의 전압 강하만으로도 셧다운 될 수가 있다. 가계의 불편을 넘어 산업의 ‘생존’이 걸린 문제임을 인식해야 한다.
Q : 에너지 시설 복구까지 얼마나 걸릴까. 또 이번 사태의 수혜자와 피해자는.
A : 정=피해 규모를 구체적으로 보면 더 절망적이다. 현재 카타르 라스라판 가스전의 핵심 트레인 14개 중 2개가 폭격당하는 등 지상 설비 피해액만 보수적으로 잡아도 2,500억 달러에 달한다. 유전은 한 번 닫으면 복구가 매우 어렵고, 시간도 오래 걸린다. 특히 LNG 냉각에 필수적인 열교환기 같은 핵심 부품은 조달에만 50개월 이상이 걸린다. 전쟁이 당장 끝나도 인프라가 정상화되기까지는 짧게는 1년, 길게는 5년 이상의 시간이 소요될 것으로 보인다. 우리는 지금 위기의 끝이 아니라 ‘초입’에 서 있는 셈이다.
A : 김=식량 위기로의 전이도 심각하게 봐야 한다. 호르무즈 해협을 통과하는 비료 원료인 요소(Urea)의 물량은 전 세계 물동량의 30%에 달한다. 에너지 수급 불안은 비료 가격 폭등을 불러오고, 이는 곧 북반구 파종 시기와 맞물려 전 세계적인 식료품 가격 폭등으로 이어진다. 국민의 밥상 물가와 직결된 생존의 위기인 셈이다. 이 상황에서 우리가 당장 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무기는 에너지 시스템의 ‘효율화’다. ‘에너지 합리화 기본계획’ 같은 정책이 있지만, 대중의 관심은 낮다. 삶의 질을 훼손하지 않으면서도 시스템적으로 에너지를 아끼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A : 이=이번 사태의 단기적 수혜국은 유가 급등과 제재 완화로 외화를 벌어들인 러시아와 셰일 가스를 수출하는 미국 에너지 기업들이다. 반면 한·중·일은 압도적인 피해국이다. 하지만 러시아는 지정학적 리스크가 아직 크기에 궁극적인 대체 공급자로 고려하기엔 한계가 있다. 지금 위기는 위험 대비 안전성 중심으로 에너지 시장이 재편되는 계기가 될 것이다.
A : 김=이번 사태를 겪으며 가장 부러운 것은 오랜 시간 축적된 일본의 인적·물적 네트워크다. 일본의 외교관과 기업들이 중동 현지에서 쌓아온 인연이 매우 깊다. 일본 상사기업들은 LNG 가치사슬 전반에도 엄청난 수의 특허와 지분을 보유하고 시장의 규칙을 만들고 있다. 반면 우리는 기반이 아직 부족하다. 한국도 기업 단위에서 실질적인 지분을 확보하고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도록 민간 주도의 에너지 생태계를 정부가 전폭적으로 뒷받침해야 한다.
A : 정=일본 종합상사들의 정보 수집 능력은 웬만한 국가 정보기관을 능가한다. 1979년 이란 혁명 당시에도 다국적 기업 셸(Shell)이 지분을 매각하고 철수할 때, 일본 현장 전문가들은 리스크를 피하거나 기회를 잡는 민첩함을 보여줬다. 민간 경영인들이 수십 년간 한 분야를 파고들며 중동 왕실과 개인적 친분까지 쌓은 결과다. 3~4년마다 바뀌는 우리 공공기관장 체제로는 이런 ‘연속성의 힘’을 이길 수 없다. 민간 역할을 전면 개방하고 육성해야 하는 이유다.
A : 이=과거 자원 개발 사업은 정치적 성과와 홍보에 매몰되어 ‘사진 찍기 좋은’ 사업 위주로 진행됐다. 유가 급등기에 급하게 뛰어들었다가 좌절을 겪기도 했다. 에너지 판은 속된 말로 ‘범생이’들이 할 수 있는 게임이 아니다. 수십 년간 갈고닦은 ‘타짜’들이 피도 눈물도 없이 달려드는 곳이다. 전문성을 바탕으로 공급망 가치사슬의 한 축을 장악하는 긴 안목이 필요하다.
A : 정=한·중·일 에너지 협력은 과거부터 시도됐으나 시장 구조가 달라 실익이 적었다. 하지만 한·일 관계는 다르다. 두 나라 모두 수입 의존도가 높고 시장 구조가 비슷하다. 국가 간 거창한 합의가 어렵다면 기업 차원에서의 긴급 비축이나 공동 구매 프로젝트부터 시작해야 한다.
A : 이=SK와 같은 민간 기업들이 이미 한·일 협력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위기 상황에서 작게 시작해 빠르게 작동하는 프로젝트 단위 협력이 생존 모델이 될 것이다.
Q : 에너지믹스 재편에 신중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온다.
A : 정=지금 같은 위기상황에선 ‘깨끗한 에너지’보다 ‘끊임없는 에너지’가 더 중요하다. 특히 ‘석탄 발전’을 다시 봐야 한다. 동해안 신규 석탄 발전소 가동률이 20~30%에 불과한데, 송전망만 확보된다면 가장 싸고 안정적으로 전기를 공급할 수 있다. 중국과 미국도 여전히 석탄을 줄이지 않고 있다. “맑은 하늘도 배고파보면 귀찮다”는 말처럼, 생존이 걸린 위기 상황에서는 고효율 석탄 발전을 보험용 카드로 활용해야 한다.
A : 이=에너지믹스에서 원자력은 과거 공격수였다면 이제는 기저 전력을 담당하는 ‘최종 수비수’ 역할을 해야 한다. 위기 상황에서는 에너지원의 선악을 따지기보다 각 에너지원이 가진 기능을 유기적으로 조율하는 감독의 안목이 필요하다. 석유 위기는 시차를 두고 오지만 전력 위기는 즉각적이다.
A : 정=중동 의존도를 낮추기 위한 수입선 다변화의 한계를 명확히 인식해야 한다. 사우디 유전은 생산단가가 배럴당 5달러 수준이지만 미국의 셰일은 50~60달러가 든다. 향후 20년, 즉 2050년까지 내다보는 장기 전략하에서 에너지 도입 가격의 경쟁력을 확보해야 한다.
A : 이=중동의 중질유(Heavy Oil)는 아스팔트부터 정밀 화학제품까지 활용도가 매우 높다. 반면에 미국의 셰일 오일은 경질유(Light Oil)라 용도가 다르다. 중동을 완전히 대체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미국과는 에너지 안보 대화를 상설화해 외부적 교란요인을 최소화하는 외교력이 필수적이다.
Q : 앞으로 있을 유사한 사태에 대비, 정부가 지금 당장 실행해야 할 정책이 있다면.
A : 이=이제는 분산된 에너지 정책 시스템을 통합 관리할 컨트롤타워가 필요하다. 이 컨트롤타워의 핵심 키워드는 ‘상설화’와 ‘전문화’다. 정치를 가급적 배제하고 전문가들이 꾸준히 정책을 수행할 수 있는 구조가 마련돼야 한다. 나는 이를 ‘스마트(SMART) 에너지 안보’ 전략으로 제안한다. 안정성(Stable), 다각적 외교(Multilateral), 첨단 기술력 지원(Advanced), 회복력(Resilience), 통합거버넌스(Total)가 그 핵심이다.
A : 정=정부는 기업을 간섭하기보다 ‘가이드라인’을 제시하고 생태계를 조성하는 역할에 머물러야 한다. 전후 복구 사업은 우리 EPC(설계·조달·시공) 기업들에 큰 기회가 될 것이다. 정유 공장 설비나 LNG선 제조 기술은 우리가 세계 최고 수준이다. 이런 강점을 활용해 우리가 글로벌 에너지 공급망의 핵심 병목을 쥐는 ‘역발상 전략’이 필요하다.
A : 김=가장 큰 리스크는 정권이 바뀔 때마다 에너지 정책의 근간이 널뛰는 것이다. 정책의 일관성이야말로 에너지 안보의 핵심이다. 탄소중립이라는 가치는 분명 소중하지만, 그것이 유일한 잣대가 되어서는 안 된다. ‘중단 없는 공급’과 ‘국민이 수용 가능한 가격’이라는 현실적 균형이 잡혀야 한다. 정치적 판단에 매몰되지 않고 20~30년을 내다보는 에너지 비전이 유지될 때 비로소 위기에 강건한 체계를 가질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