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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광장] ‘옳음’을 잃어버린 정치

Los Angeles

2026.04.12 08:00 2026.04.12 0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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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철웅 일사회 회장

박철웅 일사회 회장

영화 한 편이 사람을 오래 붙들어 놓을 때가 있다. 최근 관람한 영화 ‘왕과 사는 남자’가 그랬다. 이 작품은 단순한 사극이 아니다. 시대를 관통하여 오늘의 정치를 향해 정면으로 던지는 불편한 고발장이다.
 
이야기의 중심에는 비운의 왕 ‘단종’이 있다. 권력에서 밀려난 어린 왕, 그리고 그를 지워버리려는 냉혹한 권력. 그 서슬 퍼런 칼날 아래, 끝까지 남은 사내가 있다. 영월의 촌장 엄흥도다. 모두가 등을 돌린 자리에서 끝까지 등을 보이지 않았던 단 한 사람이다.
 
당시 단종의 시신을 거둔다는 것은 단순한 장례가 아니었다. 그것은 곧 가문의 파멸을 각오해야 하는 결단이었다. 아무도 나서지 못할 때, 엄흥도는 “옳은 일을 하다가 화를 입는 것은 달게 받겠다”며 기꺼이 나섰다.
 
이 한 문장이 주는 울림은 오늘날 한국 정치에 내려진 서늘한 판결문이다. 지금 우리 정치가 무엇을 상실했는지를 단 한 줄로 꿰뚫는 선언이다. 그래서 이 문장은 정치인들에게 불편하다.
 
이제 질문을 피할 수 없다. 정치인의 ‘옳음’이란 무엇인가. 그리고 왜 그 ‘옳음’은 늘 권력 앞에서만 고개를 숙이는가.
 
오늘의 여당, 더불어민주당의 모습은 이 질문을 정면으로 마주하게 만든다. 국회에서 여당이 표를 앞세워 일사불란하게 단독으로 법안을 처리하는 장면은 이제 낯설지조차 않다. 절차적 정당성을 내세울지 모르나, 고국을 바라보는 미주 한인들의 시선은 절대 편안하지 않다.
 
지금 여당 내부를 관통하는 흐름은 단순하다. 철저한 권력 중심의 재편이다. 권력의 향배에 얼마나 빠르게 올라타느냐, 얼마나 정확하게 줄을 서느냐가 정치적 생존의 유일한 이정표가 되었다. 그 과정에서 정책은 장식이 되었고, 철학은 실종됐으며, 가치는 공허한 구호로 전락했다. 누구를 위한 정치인가, 묻지 않을 수 없다.
 
비극적인 것은 이것을 더는 숨기려 하지도 않는다는 점이다. 과거의 계파 정치에는 최소한 ‘명분’이라는 가림막이라도 있었다. 지금은 그조차 사라졌다. 남은 것은 오직 결과뿐이다. 누가 권력을 쥐었는가, 그리고 그 곁에 누가 서 있는가다. 결국 정치의 언어는 ‘우리가 남이가’라는 천박한 연고주의로 축약된다.
 
그 과정에서 ‘의리’라는 단어가 다시 호출되지만, 그 의미는 처참하게 변질되었다. 지금의 의리는 신념이 아니라 ‘거래’다. 권력에 대한 선제적 투자이며, 보상을 전제로 한 계산기 두드리기다. 충성은 미덕이 아니라 보험이 되었고, 침묵은 비겁함이 아니라 전략으로 덧칠됐다. 이것은 정치가 아니다. 단지 고도화된 ‘생존 기술’일 뿐이다.
 
본래 정당정치는 질서를 지향한다. 공동체의 지속을 논하고, 그 안에서 자유를 수호하는 책임을 말하는 자리다. 그러나 지금의 현실은 정반대다. 질서는 복종으로 치환되었고, 자유는 줄서기로 대체됐다. 철학은 사라지고 기술만 남았다.
 
정당은 외부의 공격으로 무너지지 않는다. 내부의 기준이 무너질 때 비로소 붕괴하는 법이다. 무엇이 옳은지에 대한 최소한의 합의조차 실종된 조직은 오래 버틸 수 없다. ‘옳음’을 잃어버린 배는 결국 암초를 만나 침몰하기 마련이다.
 
정치는 현실이기에 타협이 필요하다. 그러나 모든 판단이 일사불란함으로 환원되어 침묵하는 순간, 정치는 존재 이유를 잃는다. 그때부터 정치는 사람을 버리기 시작하고, 결국 국민을 버린다.  
 
명백한 문제 앞에서도, 상식이 무너지는 순간에도 그들이 침묵하는 이유는 자명하다. 입을 여는 순간 공천과 직위, 영향력을 잃기 때문이다. 결국 정치인은 자신의 생존을 위해 양심의 입을 닫는다.
 
그러나 정치는 본래 그 반대의 지점에서 시작되는 것이다. 손해를 감수하는 용기, 틀린 것을 틀렸다고 말하는 결단, 그 기개 있는 한 사람이 있을 때 공동체는 무너지지 않는다. 안타깝게도 지금 우리에겐 그 ‘한 사람’이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는 다시 엄흥도를 소환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는 권력을 탐하지 않았고 자리를 구걸하지 않았다. 그는 단 하나, ‘옳음’을 지켰다. 지금 한국 정치가 가장 뼈아프게 잃어버린 것이 바로 그것이다.
 
결국 질문은 하나로 귀결된다. 당신은 지금 무엇을 지키고 있는가? 권력인가, 아니면 인간으로서의 최소한의 도리인가.
 
이 질문에 답하지 못한다면, ‘옳음’은 앞으로도 권력 앞에서 비굴하게 고개를 숙일 것이다. 그리고 그 끝에는 어김없이 미주 한인뿐만 아니라 온 국민의 준엄한 심판이 기다리고 있음을 명심해야 한다.

박철웅 일사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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