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인 컬렉터의 공동 컬렉션 작품이 전시되고 있는 헤레디움 '미완의 지도' 전시장. [사진 이은주]
르 코르뷔지에, 로버트 롱고, 올라퍼 엘리아슨, 데이비드 호크니, 양혜규, 아니카 이, 최병소 등 국내외 현대 예술가들의 작품이 한 공간에 나란히 전시됐다. 미리암 칸, 앙스 아르퉁, 허샹위 등 비교적 낯선 작가들의 작품도 함께 했다. 대전 복합문화예술 공간 헤레디움에서 열리고 있는 현대미술 특별전 '미완의 지도(Tracing the Unfinished)'. 14인의 미술품 컬렉터가 공동 소장한 작품을 보여주는 독특한 전시다. 그동안 미술계에선 컬렉터가 각기 내놓은 소장품으로 구성한 전시는 있었으나, 여러 명의 컬렉터가 10년 가까이 함께 만들어온 컬렉션을 보여주는 전시는 국내 최초다.
이번 전시를 준비한 주체는 2017년부터 함께해온 컬렉터 그룹 '아르케 II(ARCHE II)'다. 아르케 II는 건설·증권·회계법인 대표와 병원장 등 14명으로 구성된 모임으로, 회원으로는 조익서(기업인), 이해성 (기업인), 고신 (기업인), 유상수(회계법인대표),김동욱 (기업인), 정회훈 (사모투자 금융인), 서경선 (기업인), 오양호 (변호사), 송병준(기업인) 등이 있다. 현재 모임은 병원(한송이영상의학과의원)을 운영하는 한송이 원장이 이끌고 있으며, 또 다른 멤버이자 검사 출신 컬렉터 황인규 CNCITY에너지 회장은 이번 전시를 위해 헤레디움 공간을 제공했다. 헤레디움은 일제 강점기 1922년 대전 인동에 세워진 동양척식주식회사 대전지점 건물로 황 회장은 이곳을 보수·복원해 2023년 문화예술 공간으로 개관했다. 이번 전시엔 아르케 II의 공동 소장품 14점을 비롯해 각 멤버의 소장품 등 총 30점이 나왔다.
아르케는 본래 2010년대 중반부터 건축 문화를 함께 공부해온 모임에서 시작됐다. 이중 몇몇이 뜻을 모아 '예술을 배우고 수집도 같이하자'며 2017년 소모임을 결성했다. 롤 모델이 있다. 세계 최초의 컬렉터 공동체 '곰가죽 클럽(La Peau de l’Ours)'. 1904년 프랑스 예술 애호가 앙드레 르벨이 신진 작가를 후원하기 위해 만든 곰가죽 클럽은 10년간 작품을 꾸준히 사들인 뒤 1914년 수집품 145점을 경매에 부쳐 대성공을 거뒀다. 이들의 컬렉션엔 피카소·마티스·고갱 등의 작품도 다수 포함돼 있었다. 신진 작가도 발굴하고 투자에도 성공한 컬렉션 그룹의 사례다.
황 회장은 "회원들은 각자 법인을 운영하며 미술품을 조금씩 수집해왔다. 그러나 그룹으로 수집하는 것은 미술에 더 깊이 다가간 새로운 경험"이라고 말했다. 14인의 회원은 해마다 일정 금액을 갹출해 한 해 약 공동 예산을 마련하고, 국내외 주요 아트페어가 열릴 때 후보 작품을 골라 의논하며 3~5점씩 매입해왔다. 비교적 시간 운용이 자유로운 회원들이 페어에 직접 참여해 후보작을 추천하는 역할을 맡았다. 한 원장은 "각자 개인으로 수집하다 보면 자칫 갤러리가 주도하는 대로 끌려가는 경향이 없지 않다"며 "공동 컬렉션은 집단 지성의 힘으로 보다 주체적이고 적극적으로 미술 시장을 들여다보게 한다는 점에서 달랐다"고 말했다.
미리암 칸, 75x94cm,watercolor on paper.2015,@Miriam Cahn.[사진 헤레디움]
르 코르뷔지에, 58,5x29.3cm, 1952, [사진 헤레디움]
최병소, 54x40x1cm, 2009, 우손갤러리.[사진 헤레디움]
이들은 이미 널리 알려진 예술가보다는 새로운 작가를 발굴하는 데 초점을 맞췄다. 스위스 출신의 여성 미술가 미리암 칸, 영국 조각가 앤서니 카로, 캐나다 조각가 데이비드 알트메이드, 중국 미술가 허샹위, 독일 출신의 프랑스 미술가 앙스 아르퉁 등이 그들이다. 덕분에 전시는 국내에서 비교적 덜 알려진 이들의 작품을 친근하게 소개하는 자리가 됐다.
한 원장은 "이미 유명해진 작가의 작품을 비싸게 사서 더 비싸게 파는 게 우리의 목표는 아니다"라며 "회원 모두가 메세나 활동에 관심이 많은 만큼 무엇보다 우리가 봐서 좋고, 뻔하지 않고, 앞으로 더 높게 인정받을 작품을 주로 골랐다"고 강조했다. 이 과정에서 프랑스에 거주하는 현대미술 전문 컨설턴트(박은주 대표)의 도움도 받았다.
열네 명의 의견이 항상 일치한 것은 아니었다. 황 회장은 "처음엔 내 마음에 들지 않는 작품을 사야 한다고 적극적으로 주장하는 회원과 토론을 벌인 적도 있다"고 했다. 이어 "결국 내가 설득돼 공동으로 작품을 구입했는데, 시간이 흐르고 나니 지금은 내가 그 누구보다 그 작품을 좋아한다"며 웃었다.
그러나 공동 컬렉션은 수업료가 꽤 비싼 공부다. 이들이 이 방법을 택한 이유는 무엇일까. 한 원장은 "돈을 들이는 만큼 확실하게 배운다. 예술 작품은 아주 작더라도 직접 사보는 과정에서 작품에 대한 이해와 안목이 함께 자란다"고 말했다. 현재 회원 중 두 명은 각각 제주와 양양에 사립 미술관 건립을 준비 중이다.
두 사람은 "이번 전시를 통해 큰 예산이 아니어도 여럿이 배우며 즐거울 수 있다는 점을 알리고 싶었다"며 "다양한 규모의 컬렉션 그룹이 생겨나길 바란다"고 말했다. 한편, 이들은 '곰가죽 클럽'이 했던 것처럼 언젠가 작품을 2차 시장에 내놓아 컬렉션의 가치를 평가 받겠다는 계획이다. 한 원장은 "판매에 대해 여러 방안을 생각해보고 있으나 아직 결정된 것은 없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