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동네에는 ‘카탈로그 레조네(catalogue raisonne)’라는 것이 있다. 한 작가의 모든 작품과 관련 자료를 분류 정리하여 목록화한 자료로, ‘전작 도록’이라고 부른다. 단순히 작품 도판만 모아놓은 화집이 아니라 작품 이름, 제작 연도, 재료, 크기, 소장 및 전시 이력, 참고자료, 작가의 개인사 등을 망라한 책이다.
작가 연구에는 물론, 작품 감정에도 중요하게 활용되는 자료다. 그래서, 미술작품의 위작 시비가 있을 때마다 정확한 감정을 위한 카탈로그 레조네가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나오곤 한다.
하지만, 제대로 된 카탈로그 레조네를 가진 한국 작가는 아직 많지 않다. 김기창, 장욱진, 박수근, 이중섭 같은 작가의 카탈로그 레조네가 알려진 정도다. 미주 한인 작가의 경우는 거의 없는 것 같다. 물론, 아트 아카이브의 중요성이 높아지고, 온라인을 활용한 카탈로그 레조네 활성화 방안이 활발하게 모색되고 있지만, 아직은 충분하지 못한 것 같다.
모든 미술사 연구는 자료와 기록에서 출발한다. 남가주 한인 미술계도 이제 제법 역사가 쌓이고 연륜도 깊어졌다. 대표적 단체인 남가주한인미술가협회가 창립된 지도 50년이 훨씬 지났다. 그동안 많은 작가가 수없이 많은 작품을 제작하고 발표하면서, 미술 자료도 엄청나게 쌓였다.
하지만, 그 자료들을 한자리에 모으고 데이터베이스로 정리하는 작업은 전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한 개인이 감당할 수 있는 일이 아닌데, 후원해 주는 기관이나 단체도 없고, 관심을 가지는 사람도 거의 없고…. 그 자료들을 어떻게 분류하고 기록해서, 한국미술 세계화에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후세들에게 전달할지에 대한 고심도 없다. 예를 들어, 남가주 한인 미술의 역사를 정리한 책 한 권도 없고, 제대로 된 논문도 없는 안타까운 형편이다.
미주 한인 예술계에서는 대부분의 경우, 작가가 죽으면 그걸로 끝이다. 역사로 쌓이지 못하고 잊히고 만다. 특히, 미술의 경우 그렇다. 문학 작품은 책으로 남거나 컴퓨터에 보관되고, 음악도 악보로 갈무리될 수 있지만, 미술의 경우는 작품의 크기나 재료와 질감 등이 중요하기 때문에 원본 실물을 보관해야 한다. 미술 작품의 보존은 작가에게도 남은 가족들에게도 쉬운 일이 아니다. 정성이 필요하고 돈도 드는 골치 아픈 일이다.
그래서, 작가가 죽고 나면 작품이나 자료들도 흐지부지 사라져버리는 안타까운 경우가 많은 것이다. “오늘의 미술 자료가 내일의 역사자료(史料)”라는 말이 있는데, 정반대의 현상이 되풀이 되는 것이다.
현실이 이처럼 안타까우면 작가들이라도 나서서, 현실을 극복하고 개선하려고 노력해야 할 텐데, 미주 한인 미술가들은 기록, 정리, 보존의 중요성을 너무 소홀히 하는 것 같아 보인다. 제대로 된 카탈로그 레조네까지는 엄두를 못 내더라도, 그동안 했던 자기 작품의 명단, 내역, 작가 노트, 작품 사진 등을 꼼꼼하게 잘 보관했으면 좋겠는데, 이런 일에 진지하게 관심을 갖는 미술가는 드물다. 대부분의 작가가 이런 일에 대범하고 무관심하다. 내가 알기로는 그렇다. 스스로 하기 어려우면, 가족이나 친지 등 주위 사람의 도움이라도 있어야 할 텐데 그렇지도 못하다.
작가는 그림 그리기도 바쁜데 그런 일에 신경 쓸 여유가 어디 있느냐고 투덜거리지만, 엄격한 자기 관리도 작가의 중요한 한 부분이다. 자기 작품을 정성껏 갈무리하는 일은 곧 자기 자신을 존중하고 사랑하는 일이고, 자신과 작품이 우리 미술사의 한 부분임을 자각하는 일이기도 하다. 그리고, 자기 예술세계에 대해 가장 정확하게 기록할 수 있는 사람은 다름 아닌 작가 자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