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고닫기

[이아침에] 버무려져야 맛을 내는 김치처럼

Los Angeles

2026.04.19 18:52 2026.04.19 16:28

  • 글자크기
  • 인쇄
  • 공유
글자 크기 조절
기사 공유
이창민 목사-시온연합감리교회

이창민 목사-시온연합감리교회

미국에서 이민자로 산 지 어느덧 수십 년이 넘었음에도 여전히 영어를 써야 하는 모임이나 회의에 참석하는 일은 부담스럽다. 단순히 언어의 장벽 때문만이 아니라, 그 언어에 담긴 미묘한 문화적 뉘앙스까지 온전히 체득하지 못한 불편함이 부담감으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얼마 전 다민족 목회자 모임에 참석한 것은 주관자가 한인 2세 목회자였기에 같은 한인으로 조금이나마 힘을 보태고 싶은 마음 때문이었다.  
 
모임에는 한인 목회자들 외에도 중국, 일본, 캄보디아, 베트남, 히스패닉, 흑인, 미 원주민, 그리고 남태평양 섬나라인 통가와 사모안 출신까지 다양한 배경을 가진 열댓 명의 목회자가 각기 자기 나라를 대표해서 모였다. 별로 친하지도 않은 이들을 환한 웃음으로 맞으며 뻔한 질문을 하면서 어떻게든 어색함을 누그러뜨리려 애썼지만, 주변 공기는 차갑기만 했다.  
 
어색함을 깬 것은 사회자의 제안이었다. 각자의 이름 첫 글자로 시작하는 음식으로 자신을 소개하자고 했다. 그는 ‘켄(Ken)’이라는 자기 이름의 첫 글자인 ‘K’를 따서 자신을 ‘갈비(Kalbi)’라고 소개했다. 가장 좋아하는 음식인 동시에, 어린 시절 너무 말라 ‘갈비’라 불렸던 추억담을 곁들이며 분위기를 녹였다. 뒤를 이은 ‘브랜던(Brandon)’ 목사 역시 ‘B’로 시작하는 음식으로 ‘불고기(Bulgogi)’를 꼽았다. 한인 목회자로서 자신의 뿌리가 담긴 음식으로 자신을 정의하는 모습이 꽤 자연스러워 보였다.
 
다음 차례는 베트남 출신의 ‘쿠홍(Khuong)’ 목사였다. 모두 그가 베트남 음식으로 자기를 소개할 것이라고 짐작하면서 귀를 기울였다. 그때 그의 입에서 나온 단어는 모두의 예상을 뒤엎는 ‘김치(Kimchi)’였다. 자기는 물론 가족들 모두 김치를 너무도 좋아한다고 하면서 다양한 종류의 김치 이름을 줄줄이 대면서 이렇게 말했다. “이민자로 살다 보니 인생이 꼭 김치 같더군요. 시원하고 달콤한 맛도 있지만 눈물 나게 매운맛도 있습니다.”
 
타국인의 입에서 흘러나온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김치 인생론’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낯선 땅에 뿌리를 내리고 사는 이민자의 삶이야말로, 커다란 항아리 속에서 치열하게 버무려지며 맛을 내는 김치와 너무나도 닮았기 때문이다. 김치가 완성되기 위해서는 배추와 고춧가루, 마늘, 젓갈 등 전혀 다른 성질의 재료들이 한데 섞여야 한다. 이민자의 삶도 마찬가지다. 서로 다른 문화와 언어, 차별이라는 양념 속에서 끊임없이 ‘버무려지는’ 과정을 겪는다.  
 
이 과정은 때로 맵고 아리지만, 제각각의 자아가 부딪히며 조화를 만들어가는 이 고통스러운 버무려짐이 있어야만 비로소 깊은 맛이 우러난다. 여러 번 죽어야 김치가 된다는 배추처럼 내가 기꺼이 죽을 때, 세상 어디에서도 맛볼 수 없는 고귀하고 풍성한 어우러짐의 미학을 완성하게 된다.
 
오늘도 우리는 인생이라는 항아리 속에서 저마다의 맛으로 익어간다. 세상 풍파에 이리저리 치여 정신을 못 차릴 정도라면, 그것은 바로 ‘버무려져야 맛을 내는 김치’처럼 우리 인생이 비로소 깊고 진한 맛을 완성해 가고 있다는 가장 확실한 증거일 것이다.

이창민 / 목사·시온연합감리교회

많이 본 뉴스

      실시간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