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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익주의 고려, 또 다른 500년] 사회적 지위 한눈에 파악, 효율적인 통치 수단 역할

중앙일보

2026.04.23 08:10 2026.04.23 13: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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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 고려의 독특한 사회 운영 방식
이익주 역사학자·서울시립대 교수

이익주 역사학자·서울시립대 교수

“본관이 어디신가?” 20, 30년 전까지만 해도 초면에 이 질문을 받는 일이 있었다. 통성명한 다음 으레 이어지는 물음이었다. 그럴 때 “어디 ○씨입니다” 하지 않고 “어디 ○가입니다”라고 답하는 것이 자신을 스스로 높이지 않는 예절이라고 배웠다. 1990년대 말까지도 각종 이력서에는 본관을 적는 칸이 따로 있었고, 1999년 민법 개정으로 동성동본 혼인 금지 조항이 삭제되기 전까지는 결혼하려면 먼저 본관부터 확인해야 했다. 지금으로서는 상상하기 어렵지만 동성동본 부부가 20만 쌍에 이른다는 보도도 있었고, 금지된 사랑을 포기하지 못해서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조차 있었다. 한국인 중에 본관이 없는 사람은 없으며, 대부분 묘지의 비석에는 고인의 본관을 새겨 넣는다. 그런데 왜 본관을 묻고 적고 새기는 것일까? 그보다 먼저, 본관(本貫)이란 무엇인가?

호족 충성 얻기 위해 나눠준 성씨에
살고 있는 지명 붙여 본관 만들어져

사는 곳 따라 사회 지위 다르다 보니
본관 알면 신분·출신지 알 수 있어

조선 건국 후 문중 결속 다지는 수단
요즘은 귀화 외국인 늘며 본관 폭증

경북 안동의 태사묘. 고려태조 왕건에게 협조한 권행·장정필·김선평, 세 사람의 위패를 모신 곳이다. 권행은 태조로부터 권씨 성을 하사받고 안동 권씨의 시조가 되었다. [사진 국가유산청]

경북 안동의 태사묘. 고려태조 왕건에게 협조한 권행·장정필·김선평, 세 사람의 위패를 모신 곳이다. 권행은 태조로부터 권씨 성을 하사받고 안동 권씨의 시조가 되었다. [사진 국가유산청]

고려 이전 성씨는 지배층의 표지
사전에서는 본관을 ‘시조(始祖)가 난 곳’이라고 풀이한다. 그러나 이는 충분한 설명이 아니다. 가문마다 차이가 있지만 그 시조가 난 때는 지금으로부터 1000년도 더 전인데, 그 장소를 이처럼 오랫동안 기억할 필요가 있는지 의문이 든다. 이럴 때는 역사적 연원을 따져봐야 한다. 우리 역사에서 본관이 처음 생겨난 것은 918년 고려가 건국된 뒤의 일이다. 우선, 그전에는 본관이란 말이 없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지명과 짝해서 본관을 이루는 성씨의 사용이 고려 건국 후부터 보편화되었다. 놀라운 일이지만, 삼국시대와 통일신라를 지나는 동안 성씨 없는 사람이 훨씬 많았다. 을지문덕·연개소문·김춘추·김유신·최치원 등을 우리는 알고 있지만, 왕족이나 귀족 같은 지배층만 성씨를 사용했고 대다수는 이름만 가지고 살았다. 통일신라 말까지도 서울인 경주 사람들만 성씨가 있고 지방 사람들은 이름만 있었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송악(개성) 출신인 고려태조 왕건(王建)도 처음에는 왕씨가 아니었다. 아버지 이름은 용건(龍建), 할아버지는 작제건(作帝建)이었다. 성씨가 없으니, ‘어디 ○씨’라고 표현하는 본관도 있을 수 없었다.

고려 이전에는 성씨가 지배층임을 드러내는 표지였다. 그러니 성씨 사용이 모든 이의 선망의 대상이 되었고, 신라 말의 사회적 혼란은 무성(無姓)의 지방 사람들에게 좋은 기회가 되었다. 특히 지방에서 세력을 키운 호족들이 성씨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성씨를 스스로 만들어 쓰는 시대가 된 것이다. 김해 지역의 호족 소율희(蘇律熙)와 김율희(金律熙)는 같은 사람이다. 본래 이름은 아마 쇠유리였을 텐데, ‘쇠’의 소리에 따라 소씨라고도 하고 뜻을 따라 김씨라고도 한 것이다. 왕건은 이름의 앞글자를 성으로 삼고 뒷글자를 이름으로 남긴 경우이다. 그런데 후삼국을 통일한 왕건은 성씨 사용이 갖는 정치적 의미를 누구보다도 잘 알았다. 스스로 왕씨가 되었을 뿐 아니라 전국의 호족들에게 성씨를 나누어 주었다. 예를 들어 나주에 김(金)·나(羅)·오(吳)·정(鄭)·진(陳)·손(孫)·남(南)·박(朴)·유(柳)씨를, 안동에 권(權)·김(金)·강(姜)·조(曺)·장(張)·고(高)·이(李)씨를 내려주었다. 태조의 의도는 분명했다. 지방 호족들에게 성씨를 선물로 주고 지지와 충성을 이끌어내려 한 것이었다. 반면, 호족들은 국왕이 내려준 성씨를 사용함으로써 자신의 지위를 인정받았음을 과시하며 세력을 유지할 수 있었다. ‘지방 사람들이 세운 나라’ 고려에서 왕실과 지방 세력가들이 성씨를 주고받으며 절묘하게 결합했던 것이다.

경기도 여주의 서희 장군 묘. 서희의 할아버지 서신일이 왕건에게 협조하고 이천 서씨의 시조가 됐다. [사진 이익주]

경기도 여주의 서희 장군 묘. 서희의 할아버지 서신일이 왕건에게 협조하고 이천 서씨의 시조가 됐다. [사진 이익주]

고려시대 백정은 성이 없는 보통 사람
성씨 사용이 확산되면서 비로소 지명과 결합한 본관이 만들어졌다. 따라서 사전의 ‘시조가 난 곳’이란 구체적으로는 ‘고려 초에 성씨를 받은 조상이 살던 곳’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그런데 한 가지 더 생각할 것이 있다. 성씨 사용이 아직도 소수의 지배층에 한정되고 인구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보통 사람들은 여전히 이름만 가지고 살았다는 점이다. 그럼 이들의 본관은 어떻게 되었을까? 이들은 본관만 있고 성은 없는, 그래서 ‘어디 ○씨’라고 하지 못하고 ‘본관이 어디’라고만 하게 되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고려에서는 성씨가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으로 신분이 갈렸다. 성씨가 있는 사람은 ‘백성(百姓)’이라고 불리며 지배 신분이 되었고, 관리가 될 수 있었다. 그에 반해 성이 없는 사람은 백정(白丁)이라고 했다. 조선에서 소 잡는 천민을 백정, 피지배층 일반을 백성이라고 부른 것과 달랐다. 또 다른 점이 있었다. 고려시대에는 어디 사느냐에 따라 사회적 지위가 달라졌다. 전국에 약 1400개의 행정 구역이 있었는데, 그중 150개 정도는 수령이 파견되는 주현(主縣), 350개 정도는 수령 없이 옆 고을 수령이 통치하는 속현(屬縣), 나머지 900개 정도는 부곡(향·소·진·역·장·처 포함)이었다. 주현, 속현, 부곡으로 내려갈수록 주민들의 지위가 낮아졌고, 세금·부역 등 국가에 대한 의무도 많아졌다. 부곡에도 성씨 있는 사람이 살았지만, 주현·속현의 백성에 비해 차별받았다. 한 예로, 부곡의 백성은 관리가 되어도 7품까지만 승진할 수 있었다. 반면, 조선에서는 행정 구역이 약 350개로 줄고 모두에 수령이 파견되었으며, 지역 간 차별도 없어졌다. 차별의 소멸은 역사가 발전한 결과였다.

충남 부여에서 출토된 백제 유물인 사택지적비. 사택은 삼국시대 백제 귀족의 성씨다. [사진 국가유산청]

충남 부여에서 출토된 백제 유물인 사택지적비. 사택은 삼국시대 백제 귀족의 성씨다. [사진 국가유산청]

그런데, 고려의 이 제도는 너무 복잡하지 않은가? 성씨가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이 신분으로 나뉘고, 또 사는 곳에 따라서 주현·속현·부곡 주민 사이에 차별이 있으니 말이다. 어떤 사람의 지위를 알려면 신분과 사는 곳을 모두 물어봐야 했을 것이다. 이 번거로움을 간단히 해결하는 방법이 바로 본관을 묻는 것이었다. 예를 들어 ‘모산 박씨’라고 하면 부곡의 백성이고, ‘본관은 충주인데 성이 없다’ 하면 주현의 백정이었다. 모산이 부곡이고 충주가 주현이란 사실은 당시엔 누구나 다 알았다. 그래서 고려에서 “본관이 어디신가?”는 그저 하는 겉치레 인사가 아니라 상대방의 신상을 캐묻는 질문이었다. 그런데, 고려의 이 제도는 너무 허술하지 않은가? 사는 곳에 따라 차별을 받는다면, 거주지를 옮겨 차별을 피하면 될 일이니 말이다. 여기서 고려 사회의 아주 독특한 모습 하나가 드러난다. 고려에서는 거주지를 자유롭게 옮기지 못했다. 옮기려면 관청의 허가를 받아야 했지만 쉬운 일이 아니었다. 특히 부곡 사람이 속현이나 주현으로 이주하는 것은 엄격하게 금지되었다. 성씨가 있는 백성의 경우, 대대로 고을의 향리가 되었으므로 오히려 다른 곳으로 떠나면 안 되었다. 과거에 급제해서 서울로 올라가는 것이 거의 유일한 탈출구였다. 결국 고려 사람들은 대부분 조상부터 살아왔던 곳, 즉 본관에 살았다. 그러니 고려에서 “본관이 어디신가?”는 시조가 아니라 본인이 어디 사는지를 묻는 질문이었다.

이처럼 본관은 개인에게는 벗어나지 못하는 운명 같은 것이었고, 국가로서는 효과적인 통치 수단이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본관과 거주지가 일치할 때만 의미가 있었다. 고려 후기가 되면 본관을 떠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몽골과 전쟁을 치르면서 집단으로 이동하는 일이 많이 생긴 것이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거주지와 괴리되면서 본관이 본래 기능을 하기 어렵게 되었다. 동시에 지역 간 차별이 소멸하고 천민이 아니면 누구나 성씨를 쓰게 되면서 본관의 의미 역시 퇴색했다. 조선이 건국된 뒤로 본관은 과거의 유산이 되었지만, 이것을 되살려 문중의 결속을 다지는 수단으로 활용하는 일이 벌어졌다. 본관을 기준으로 족보를 만들고, 동성동본 혼인을 금지한 것도 조선에서 시작되었다. 지금까지도 그 흔적이 남아 본(本)이 같으면 한 집안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고려시대 본관제가 한창 시행될 때 성씨가 없던 그 많은 사람들의 후손은 지금 누구와 한 집안 사람이 되고 있을까?

『세종실록』 지리지의 청주목 부분. 청주를 본관으로 하는 12개 성씨가 기록돼 있다. [사진 국사편찬위원회]

『세종실록』 지리지의 청주목 부분. 청주를 본관으로 하는 12개 성씨가 기록돼 있다. [사진 국사편찬위원회]

5582개 성씨, 3만6744개 본관
최근 성씨와 본관은 급격한 변화를 겪고 있다. 2000년까지 성씨가 300개 미만, 본관이 4000여 개로 유지되던 것이 2015년 통계에서는 성씨가 5582개, 본관이 3만6744개로 폭증했다. 외국인 귀화가 늘고 성씨와 본관을 만드는 창성창본(創姓創本)이 사실상 자유로워졌기 때문이다. 전통을 내세워 변화를 막을 것인가. 역사를 올바르게 아는 것은 전통에 얽매이지 않기 위함이다. 전통을 지키려고만 할 때 역사는 힘이 아니라 짐이 된다.

이익주 역사학자·서울시립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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