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에도 정치 못잖은 모순적 레토릭이 종종 스며든다. 건전한 인플레, 지속 가능한 적자, 소득 주도 성장… 일본에선 한 걸음 더 나갔다. 과열조차 관리하면 문제 없다는, 이른바 ‘착한 버블’까지 나올 판이다. 다카이치 사나에(髙市早苗) 총리의 경제정책, 사나에노믹스를 보면 그렇다.
확장재정과 금융완화를 골자로 한다는 면에서 아베노믹스와 비슷하지만, 강도가 더 세다. 올해 122조3000억엔이라는 사상 최대의 예산을 편성했다. 또 장기간의 금융완화로 저금리를 유지한다는 구상이다. 경제를 한껏 달궈 과열 직전으로까지 몰아붙이자는 것이다.
정근영 디자이너
이처럼 금융과 재정 양면에서 정책적으로 시장에 압력을 가해 수요 초과 상태로 만드는 걸 고압경제(high pressure economy)라 한다. 노동 수급이 빡빡해지면 실업자가 취업하는 것은 물론이고, 기존 취업자들은 더 높은 수준의 일자리로 옮길 수 있게 된다. 고용의 사다리 효과다. 그에 따라 실질임금과 생산성이 함께 높아진다. 또 초과수요는 기업에겐 이윤 확대의 찬스이므로, 생산과 투자도 증가한다. 이 연쇄효과가 반복되며 성장을 이끈다는 게 고압경제의 핵심이다.
근거 중 하나가 실업과 성장의 상관관계를 규명한 ‘오쿤의 법칙’이다. 실업률이 1%포인트 하락할 때 국내총생산(GDP)은 3% 증가한다는 아더 오쿤(1928~80) 전 백악관 경제자문위원장의 지론이다. 3%를 ‘오쿤의 계수’라고도 한다. 고용의 사다리 효과도 그의 주장이다. 사나에노믹스 역시 오쿤의 경로를 추구한다. 이미 일본에선 25~34세 여성의 노동 참여율이 지난 3월 85%로 미국(83.7%)을 앞질렀다.
김경진 기자
다만 실업률이 낮아질수록, 즉 경기가 좋아질수록 물가는 상승한다. 고압경제의 부작용이다. 옹호론자들은 고압으로 인한 득이 크므로 인플레의 타격은 상쇄하고도 남는다고 본다. 완전고용, 임금 상승, 생산성 향상, 잠재성장률 개선을 달성할 수 있다면 인플레쯤은 감수하겠다는 것이다.
사실 일본 정부는 인플레를 은근히 반길지 모른다. 지난해 말 잔액 1200조 엔에 달하는 국채의 상환 부담이 가벼워지기 때문이다. 재무성에 따르면 일본국채의 잔존만기는 9년7개월이다. 인플레를 연 2%로 가정하고 만기의 실질가치를 계산하면 현재가보다 17.3% 적어진다. 금액으론 200조엔 넘게 부담을 더는 셈이다. 일본의 20년치 방위비에 해당하는 규모다.
김경진 기자
이론의 원산지는 미국이다. 훗날 연방준비제도이사회(Fed) 이사를 지낸 헨리 월리치(1914~88)가 1956년 예일대 기고문에서 처음 사용했다. 그 뒤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이자 월리치의 예일대 동료였던 제임스 토빈(1918~2002)과 케네디-존슨 정부에서 일한 오쿤이 고압경제를 지지했다. 가장 최근에 언급한 이는 Fed 의장(2014~18)이었던 재닛 옐런이다. 2016년 보스턴 연준 컨퍼런스에서 고압경제로 공급 측면의 부진을 반전시킬 가능성에 대해 설명했다.
정작 창안자인 월리치는 저압경제를 선호했다. 연준 이사 시절 폴 볼커(1927~2019) 의장과 함께 강경 매파였다. 옐런 역시 고압경제를 언급한 뒤 오히려 3회 연속 금리를 인상했다. 그는 나중에 “고압경제를 권장한 기억이 없다”고 했다.
한국에서도 유사한 인식이 있었다. 제5공화국 마지막 대통령실 경제수석이었던 박영철(87) 고대 석좌교수는 퇴임 후 3저 호황을 회고하며 이런 취지의 말을 했다. 호황 때 머뭇거리지 않고 악셀레이터를 꾹 밟으면 경제가 크게 성장해 새로운 단계에 접어들 것 같더라. 그는 “학자로선 조심스러운 말”이라는 단서를 달았다. 돌이켜보면 고압경제와 같은 맥락이다.
현재 세계적으로 고압경제를 정책의제로 진지하게 다루는 나라는 일본이 거의 유일하다. 일본 경기순환학회는 2022년 6월 고압경제 연구부를 구성해 논문들을 발표해 왔다. 미국과 유럽에선 인플레 탓에 논외로 밀려났다.
정근영 디자이너
일본의 고압경제론은 정책결정 기구에 투사되고 있다. 한국은행 금융통화위원에 해당하는 자리에 선명한 고압경제론자가 곧 합류한다. 오는 6월 일본은행 심의의원에 취임하는 사토 아야노(佐藤綾野) 아오야마학원대 교수가 주인공이다. 그는 경기순환학회 이사로 ‘노동생산성을 높이기 위해 고압경제가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논문을 썼다. 그에 앞서 금융완화론자인 아사다 도이치로(浅田統一郎) 주오대 명예교수가 이달 초 심의의원에 취임했다. 둘 다 다카이치 총리가 지명했고, 금리 인상에 무게를 두는 우에다 가즈오(植田和男) 일본은행 총재와는 거리가 있다. 니혼게이자이(日本經濟)신문은 사설에서 “물가에 불안을 남긴 인사”라고 지적했다.
여러 연구에도 불구하고 고압경제는 완전히 검증된 상태가 아니다. 잠재성장률을 높여준다는 경로가 충분히 밝혀지지 않았다. 경제의 압력을 측정하는 계기판도 부정확하다. 실업률은 수학적으로만 움직이지 않는다. 고용제도, 기업의 인사 관행, 문화적 특성의 영향을 두루 받는다.
2013년에도 일본은행은 “단카이(1차 베이비 부머) 세대의 퇴직으로 인력이 부족해 임금이 상승할 것”이라고 내다봤지만, 보기 좋게 빗나갔다. 퇴직 고령자들과 여성이 저임 직종에 들어오면서 임금상승 압력이 새나갔기 때문이다. 노동시장 구조는 고압경제를 구현하려는 지금이나 그 때나 크게 다를 바 없다.
정근영 디자이너
또 금융완화는 미래의 소비를 먼저 끌어 쓰고, 확장재정은 장차의 소득을 앞당겨 쓰는 효과가 있다. 지출 시점을 바꾼다고 성장까지 따라온다는 보장은 없다. 게다가 인플레 상황에선 위험천만의 역주행이다.
30년 넘는 지긋지긋한 디플레에서 겨우 벗어나려는 일본의 입장은 사뭇 다르다. 좀 과장하자면, 미검증 신약을 삼키려는 절박한 환자의 심정이라고나 할까. 고압경제론자들에게 최근의 물가 동향은 초인플레 걱정을 후순위로 밀어냈다. 2025년 3.2%에 달했던 일본의 소비자물가 상승률(전년대비)은 올 2월 1.3%로 떨어졌다. 4년 연속 2%를 넘다 올들어 꺾인 물가 곡선은 소비의 허약함을 드러낸다. 다른 선진국과 달리 일본에서 고압경제가 주목받고 있는 배경이다.
그에 비해 미국에선 3월 물가가 2월에 비해 0.9%, 1년 전에 비해선 3.3%나 올랐다. 손성원 로욜라 메리마운트대 교수는 미주중앙일보 기고에서 “금리 인하의 문턱이 높아졌다”고 진단했다. 미국 금리가 그대로인데 일본이 고압경제를 위해 저금리로 향한다면, 기다리는 건 초엔저 시나리오다. 일본 정부가 원하는 바인지도 모른다.
그럼 이게 일본 가계에 바람직한 걸까. 초엔저와 인플레는 구매력과 실질임금을 감소시킨다. 이에 더해 저금리 정책은 가계의 이자수입을 감소시킨다. 이래저래 가계를 더 가난하게 만든다. 소득격차를 키우는 효과도 무시할 수 없다. 서민과 중산층 대상의 조용한 수탈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돈을 푼다고 기업들이 투자를 늘릴지도 의문이다. 일본기업들은 자금사정이 윤택하다. 돈이 없어서가 아니라, 이유가 없어서 투자를 안 할 뿐이다. 투자를 해도 해외에서 한다. 일본이 무역적자에도 불구하고 GDP 3~4%의 경상수지 흑자를 내는 건 기업들이 해외투자에서 벌어들인 소득수지 덕분이다.
이런 상태에서 확장재정과 금융완화는 자산가격을 끌어올릴 수밖에 없다. 부동산과 주식 시장에 거품이 끼기 쉽다. 이게 마지막엔 실물경제를 끌어들여 거대한 조정을 거치는 법이다. 거품은 결국 터진다. 물론 고압경제가 버블을 만들겠다는 정책은 아니다. 그러나 작동 방식은 ‘관리된 과열’ 또는 ‘작은 버블’을 감수하는 전략이다. 버블을 의도하진 않지만, 결과를 알면서도 강행하는 미필적 고의에 가까운 선택이다. 사나에노믹스의 고압경제는 프로메테우스의 불처럼 대가를 전제로 한다.
반대 방향의 우에다 일본은행 총재는 얼마 전 “실질금리가 매우 낮고 금융환경은 대단히 완화적”이라고 말했다. 또 수요가 공급에 비해 0.45% 정도 초과 상태여서 인플레 압력이 예상된다고도 했다. 고압경제에 대체로 회의적인 일본 언론들은 이를 금리 인상의 명분 다지기로 해석한다. 채권시장에서 장기금리는 이미 지난주 2.435%로 10년만의 최고치에 이르렀다. 지난 20일 일본은행 조사에서 소비자들은 5년 뒤 물가가 평균 10.3% 상승할 것으로 예상했다. 통계와 심리 사이엔 적잖은 온도차가 있다.
정부 수반과 중앙은행 총재의 상반된 입장이 언제까지나 평행선을 달릴 수는 없다. 하늘에 태양이 둘일 수 없듯, 경제 사령탑도 마찬가지다. 조만간 교통정리가 될 텐데, 마찰음의 데시벨에 따라 시장이 오락가락할 가능성이 있다. 1971년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한 사이먼 쿠즈네츠(1901~85)는 이런 말을 했다. “세상에는 네 종류의 나라가 있다. 선진국, 후진국, 아르헨티나, 그리고 일본.” 그의 말처럼 일본은 지금도 예외의 길을 걷고 있다.
‘더 롱뷰(The Long View)’는 멀리 보고, 깊게 생각하는 독자를 위해 준비했습니다. 경제 이슈의 본질과 맥락을 파고듭니다. 중앙일보 편집국장을 지내고, 현재 미주 중앙일보 대표를 맡고 있는 남윤호 대기자가 사안을 꿰뚫는 날카로운 관점을 제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