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양소주 조웅래 회장(맨 오른쪽)이 지난 25일 대전 계족산 황톳길에서 산책 나온 가족과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2006년 계족산 임도를 활용해 만든 황톳길은 14.5㎞로, 국내 맨발길 중 가장 길다. 김성태 객원기자
‘대전 명물’ 하면 뭐가 떠오르시나. 전국의 빵돌이, 빵순이를 불러들이는 성심당? 오월드 재개장을 손꼽아 기다리게 하는 늑대 ‘늑구’? 지난달 스무 돌을 맞은 계족산 황톳길도 빼놓을 수 없다. 어쩌면 황톳길이야말로 대전의 진짜 보물일지 모른다. 계족산 황톳길 덕분에 맨발 걷기 열풍이 비롯됐고, 전국 방방곡곡에 맨발길이 우후죽순 생기고 있어서다. 지난달 25일, 맨발길 ‘원조 맛집’ 계족산 황톳길을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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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가 인사하는 중절모 할배
완연한 봄은 계족산 황톳길을 걷기에 가장 좋을 때다. 신록과 황토의 색 대비도 아름답다. 김성태 객원기자
오전 11시, 선양소주 조웅래(67) 회장을 황톳길 서쪽 어귀인 장동산림욕장에서 만났다. 중절모 쓴 조 회장은 악수하자마자 당연하다는 듯 신발과 양말을 벗었다. 그가 황톳길에 들어서자 지나치는 사람마다 인사를 건넸고, 함께 사진을 찍자며 다가왔다.
“우와, 회장님이다. 어제 인스타그램에서 먹방 영상 봤어요.”
“이렇게 좋은 길을 만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어린이부터 대학생, 70~80대 어른까지 그냥 지나치는 이가 없었다. 조 회장도 특유의 장난스러운 표정으로 사람들과 사진을 촬영했다. 조 회장은 온갖 TV 프로그램에 출연한 유명인일뿐더러 SNS 구독자 20여만 명을 거느린 ‘인플루언서’다. 사람들이 조 회장에게 고마움을 표하는 이유는 단순하다. 그가 황톳길을 만든 주인공이어서다.
계족산 황톳길은 2006년 4월 조성됐다. 요즘처럼 맨발 걷기가 유행하기 한참 전이었고, 제주올레나 지리산 둘레길 같은 트레일도 조성되지 않은 시절이었다.
시작은 우연이었다. 조 회장이 지인들과 계족산으로 산책을 왔는데 하이힐을 신은 여성이 있었다. 조 회장이 신발을 벗어줬고 자신은 맨발로 걸었다. 돌길을 5시간 동안 걷기는 쉽지 않았다. 발이 뻐근했다. 한데 반전이 일어났다. 조 회장은 이날 잊지 못할 ‘꿀잠’을 잤다. 이튿날 일어났더니 머리가 상쾌했고 몸도 가벼웠다. 이런 경험은 난생처음이었다. 조 회장의 설명이다.
“계족산은 마라톤 훈련차 자주 찾았는데 맨발로 걸은 건 처음이었죠(그는 26년차 마라토너다). 좋은 건 나눠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대전시를 설득해서 14.5㎞에 이르는 맨발길을 조성하기로 했습니다.”
조웅래 회장은 황톳길 작업반장을 자처한다. 전북 김제 등지에서 최상급 황토를 가져와서 수시로 보충하고, 뒤집고, 물을 뿌려서 걷는 이들이 황토의 매력을 만끽하도록 한다. 김성태 객원기자
시작은 순탄치 않았다. 롤러로 길을 평탄하게 하면 충분하겠다 싶었는데 금세 길이 울퉁불퉁해졌다. 황토와 마사토를 섞어서 깔아봤지만 거칠거칠한 촉감이 영 별로였다. 결국 100% 황토가 답이었다. 전북 김제·익산 등지에서 질 좋은 황토를 가져와 깔았다. 일반 등산객을 배려해 산길 절반은 그대로 두고, 황톳길은 1.5m 폭에 맞춰 계족산 허리를 둘렀다. 조 회장은 “황토를 두 발로 밟으면 촉감도 좋지만 불그스름한 때깔이 초록 숲과 어우러져 시각적인 만족도도 높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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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회 연속 한국 관광 100선
계족산 황톳길은 아이들도 좋아한다. 질퍽질퍽한 황토를 가지고 노는 아이들의 모습. 최승표 기자
원래 계족산(423.9m)은 동네 주민이나 찾는 한적한 산이었다. 식장산·보문산·장태산처럼 대전의 명산으로 꼽히지도 않았다. 하나 황톳길이 산의 운명을 바꿨다. 황톳길은 계족산 중턱 해발 200~300m 임도에 걸쳐 있는 데다, 해발 150m께 주차장에서 조금만 올라가면 돼 아이도, 노인도 걸을 만하다.
황톳길 덕분에 계족산은 전국적인 가족여행지로 떠올랐다. 2015년부터 5회 연속 ‘한국관광 100선’에 들기도 했다. 현재는 방문객의 3분의 2가 타 지역민이란다. 지난달 25일 제주에서 온 문형식(46)씨는 “종종 맨발로 해변을 걷는데 계족산의 쿠션감이 월등히 좋다”고 말했다.
사람들이 착각하는 게 있다. 계족산은 조 회장 소유가 아니다. 면적 대부분이 국유림이고, 관리 주체는 대전시다. 황톳길만 예외다. 길을 조성한 선양소주가 관리한다. 황톳길 관리는 만만치 않다. 비가 많이 오면 여지없이 유실된다. 하여 수시로 새 황토를 깔아야 한다. 해마다 보충하는 황토량이 2000t에 달한다. 이게 다가 아니다. 사람들이 촉촉한 황토를 밟도록 매주 흙을 뒤집고, 물도 뿌려야 한다. 이 비용이 한해 10억원쯤 된다. 2006년부터 산길에 깐 황토는 약 4만2000t에 달하고, 황톳길 관리와 유지에 들어간 돈은 210억원가량 된다.
김영희 디자이너
210억원에는 황톳길에서 열리는 각종 행사비도 포함된다. 선양소주는 2007년부터 4~10월 주말마다 ‘숲속음악회’를 열었다. 산 중턱 야외 공연장에서 클래식 가수를 초청해 무료 공연을 진행하고 있다.
봄마다 ‘계족산맨발축제’도 연다. 올해는 5월 9~10일, 7년만에 축제를 재개한다. 10일에는 축제 하이라이트인 ‘선양마사이마라톤’이 열린다. 황톳길 코스 13㎞를 달리는 국내 유일의 ‘맨발 달리기 대회’다. 올해는 2006명이 참가하는데 기록을 측정하진 않는다. 맨발의 자유를 만끽하며 완주하면 메달과 간식, 과일 소주 하이볼을 준다. 축제는 무료, 마라톤 참가비는 3만원이다.
4~10월에는 주말마다 '숲속음악회장'에서 '뻔뻔한 클래식' 공연이 펼쳐진다. 탁 트인 자연이 대형 공연장 부럽지 않다. 최승표 기자
계족산 맨발축제의 하이라이트인 '선양마사이마라톤'이 7년만에 개최된다. 올해는 5월 10일 대회가 열리고, 참가 신청은 4월 30일까지 받는다. 사진 선양소주
선양소주는 2025년 영업이익 65억원을 기록했다. 과거 적자였던 해도 있었다. 그때도 황토 깔기는 멈추지 않았다. 음악회도 꾸준히 열었다. 맨발 걷기만이 아니라 숲에서 오감을 두루 만족해야 진짜 ‘에코힐링(숲 치유)’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조 회장은 불경기와 중동 전쟁 탓에 힘들다면서도 웃음은 잃지 않았다.
“솔직히 요즘 소주도 잘 안 팔리고, 황토 운반비도 치솟고. 정말 죽을 맛입니다. 그래도 열심히 해야지, 어쩌겠습니까? 저의 또 다른 직함이 황톳길 작업반장 아닙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