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연방대법원이 29일(현지시간) 흑인 대표성을 보장하기 위해 만든 루이지애나주의 연방하원 선거구 지도에 위헌 판결을 내렸다. 오는 11월 중간선거를 앞두고 수세에 몰린 공화당에 유리한 판결로, 미국 정치권의 선거구 전쟁이 더욱 치열해질 것으로 관측된다.
지난 3일(현지시간) 미 워싱턴DC에 있는 대법원. AP=연합뉴스
AP통신 등에 따르면 대법원은 이날 해당 선거구 지도를 “위헌적 인종 게리맨더링”으로 판단하고 1965년 투표권법 제2조 적용 범위를 크게 제한했다. 게리맨더링은 특정 정당이나 후보에게 유리하도록 선거구를 인위적으로 나누는 행위를 뜻한다. 특히 앨라배마·조지아 등 남부 지역에서는 소수인종 대표성을 둘러싼 선거구 논쟁이 오랫동안 이어져 왔다.
루이지애나주는 흑인 인구가 전체의 약 3분의 1에 달하지만, 기존 6개 연방하원 선거구 중 흑인 다수 선거구는 1곳뿐이었다. 이에 대표성이 제대로 반영되지 않는다는 소송이 제기됐고 주 의회는 2024년 흑인 다수 선거구를 2곳으로 늘린 새 지도를 마련했다. 그런데 이날 대법원이 해당 선거구 지도가 인종을 과도하게 고려한 것이라고 판단, 무효화한 것이다.
이번 판결의 핵심 쟁점은 소수인종 대표성을 높이기 위한 선거구 설계가 오히려 헌법이 금지하는 ‘인종 차별’에 해당하는지 여부였다. 한마디로 백인을 역차별했는지 따져봤단 얘기다. 쟁점의 중심에는 투표권법 제2조가 있다. 문맹 테스트 등 차별적 투표 관행을 금지하고 소수인종 유권자의 정치 참여 확대를 뒷받침해온 조항인데, 이번 판결은 선거구 획정 등에 이 조항의 적용 범위를 제한했다. 의도적 인종 차별이 있었음을 더 강하게 증명해야 한다면서다. 대법원에서 다수 의견을 작성한 보수 성향 새뮤얼 알리토 대법관은 “투표권법 제2조는 헌법을 집행하기 위한 것이지 헌법과 충돌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라며 이번 판결의 배경을 밝혔다.
파란색은 루이지애나주의 기존(공화당 우세) 선거구를, 빨간색은 흑인 유권자 밀집 지역을 이어 만든 다수-소수 선거구(논란이 된 재획정 구간)를 표시한 지도. 사진 뉴욕포스트 캡처
공화당은 환영하고 있다. 흑인 유권자는 민주당을 지지하는 경우가 많아서다. 판결 직후 플로리다 주의회는 공화당 소속 론 디샌티스 주지사가 주도한 연방하원 선거구 재획정안을 승인했다. 뉴욕타임스는 이 지도가 “공화당에 최대 4석을 추가로 안겨줄 수 있다”고 분석했다. 워싱턴포스트 역시 “남부 지역에서 소수인종 다수 선거구 재조정을 촉발해 흑인 민주당 의원들의 의석을 위태롭게 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공화당 소속 리즈 머릴 루이지애나주 법무장관도 “연방법원이 주 정부에 인종 기준 지도를 강요해 온 악몽이 끝났다”고 평가했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역시 이날 트루스소셜에 “법 아래에서의 평등한 보호를 위한 거대한 승리”라고 적었다.
2023년 1월 26일(현지시간) 미 텍사스주 오스틴에 있는 텍사스주 의사당. AFP=연합뉴스
최근 공화당은 텃밭인 플로리다와 텍사스 보궐선거에서 잇따라 패하고, 조지아 등 전통적 우세 지역에서도 수세에 몰린 상황이었다. 하지만 이번 판결로 선거구 재편을 통한 의석 구조 변화 가능성이 열리면서 전략적 돌파구를 마련했다는 분석이 나온다.
미국 하원 소수당 대표인 하킴 제프리스(민주당, 뉴욕주)가 29일(현지시간) 워싱턴 DC 국회의사당에서 열린 의회 흑인 의원 연맹 기자회견에서 루이지애나주에 흑인 유권자가 다수인 두 번째 하원 선거구를 만드는 선거구 지도를 막은 대법원 판결에 대해 발언하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민주당 진영은 강하게 반발하고 있다. 진보 성향 엘레나 케이건 대법관은 반대 의견에서 “오늘 결정은 제2조를 사실상 사문화하는 것”이라며 “주의회가 법적 제약 없이 소수인종 시민의 투표권을 체계적으로 약화할 수 있게 됐다”고 비판했다. 의회 내 흑인 의원들의 정책 협의체인 흑인코커스(CBC)를 이끄는 민주당 소속 이벳 클라크 의장과 의원들은 “대법원이 투표권법의 사망진단서에 서명했다”고 비난했다. 데릭 존슨 흑인민권운동단체 NAACP 회장도 “대법원이 흑인 유권자와 민주주의를 배신했다”고 밝혔다.
이번 판결은 그간 미 전역에서 일었던 선거구 재획정 경쟁과도 맞물려 있다. 미국은 통상 10년마다 인구총조사 이후 선거구를 조정하지만, 최근에는 중간선거를 앞두고 이례적인 중간 재획정이 이어지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이 텍사스 등 공화당 우세주에 재획정을 압박하면서 미주리·노스캐롤라이나·오하이오·캘리포니아·유타 등에서 맞대응식 지도 재편이 진행됐다. 공화당에 유리한 흐름이 이어졌지만, 지난주 버지니아에서는 민주당에 유리한 지도가 승인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