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멈의 성씨는 박(朴)이고 이름은 환(環)이다. 영남 화산(花山·안동) 출신이라고 한다. 우리 집안에 들어와 3대에 걸쳐 50년 동안 봉사하다가 나이 74세에 평온한 가운데 세상을 떴다. 할멈은 성품과 행실이 빼어난 데다 사대부 부인의 기풍이 있었기에 특별히 기록하여 후세에 전하고자 한다.”(‘환모기사(環姥紀事)’)
위 박환의 전기는 숙종조에 영의정을 지낸 서종태(徐宗泰·1652~1719)의 문집 『만정당집』에 실려 있다. 여종 박환의 탁월함은 한 두 가지가 아니지만 서종태가 주목한 것은 인품이었다.
명문가 출신이지만 부귀영화 경계
정승 오르자 “복 넘친다”며 사직서
소론 탕평파, 경상도 인재 기용 주장
자기 단속 엄정, 과한 선물 거부해
아들 명균, 손자 지수까지 정승 3대
“요절한 장남 뒤에 묻어 달라” 유언
서종태 초상. [사진 이숙인]
“그는 사람됨이 어질고 굳세며 즐겁고 온화했다. 말을 할 때는 항상 신중하고 정확했으며, 사람을 대할 때는 진실되고 겸손했다. 남의 허물을 들으면 잠시 말없이 있다가 ‘이는 반드시 잘못 전해진 것일 것’이라 하였고, 남의 선행을 들으면 기뻐하며 얼굴빛이 환해졌다. 하지만 마음에 옳지 않다고 여기는 일에는 단호하고 굳세어 조금도 아첨하지 않았다. 살아서는 미천했지만 모두가 그를 공경했고 죽어서는 후손이 없었지만 모두가 그를 위해 눈물 흘리며 그리워했다.”
노비에게 따듯한 시선, 기록으로 남겨 노비의 삶이 그렇듯 박환도 사대부가의 수족으로 살다 이름 없이 사라질 운명이었다. 하지만 박환의 인품과 행실에 감응한 25세의 기록자 서종태로 인해 길이 남게 되었다. 신분의 빗장을 걷어낸 서종태는 박환을 통해 삶의 의미를 묻고 있는 것이다.
서른의 나이에 문과 급제로 관료계에 발을 들인 서종태는 차근차근 승진하며 모든 청요직을 두루 거쳐 예순에 인신(人臣) 최고의 자리 영의정에 오른다. 이렇게 서술하면 그가 마치 관료직에 전 인생을 건 것으로 비칠 법도 하다. 그러기에는 서종태의 정치와 인생은 우리가 위인전에서 만난 성취지향적인 인물과는 색상이 달랐다. 어려운 환경에서 각고의 노력으로 과거에 급제하여 집안과 향촌의 신화가 된 ‘촌놈’과는 트랙이 달랐기 때문일까. 우의정이 되고 좌의정이 되고 종국에는 영의정이 되었지만 그는 지위에 급급하지 않았다. 정승에 올랐는데 곧 정사(呈辭·사직서)를 제출한다. 숙종조의 조정 기록에는 여러 이유를 대며 떠나려는 정승 서종태가 내 곁에 있어 달라며 사정하고 회유하는 왕과 실랑이를 벌이는 장면이 빈번하게 등장한다.
“경(卿)은 학문과 명망이 정승에 합당하니, 이번의 대배(大拜)도 늦다 하겠다. 어찌하여 겸양이 이처럼 너무 지나친가? 빨리 나와 도(道)를 논하라.”(숙종 31년 12월 6일)
정승은 되기도 어렵지만 그만두기는 더 어려웠던 것 같다. 숙부 서문중과 정승으로 같은 조정에 서게 되자 ‘복이 넘치는’ 것을 두려워하여 ‘마음이 불안할’ 정도였다는 말은 서종태의 의식 세계를 보여준다. 관료이기 이전에 학문에 정체성을 둔 그는 과유불급(過猶不及)이나 물극필반(物極必反) 즉 ‘지나침은 모자람만 못하다’거나 ‘만사 극에 달하면 반전한다’는 지혜들로 자신을 담금질해 온 것이 아닌가.
그에게는 고조 서성(徐渻·1558~1631)에서 부친 서문상(徐文尙·1630~1677)에 이르기까지 선조가 깔아놓은 푸른 운동장이 정계로 통하고 학계로 통하는 길이었다. 이러한 태생적 조건은 부귀영화라면 모를까 한 개인의 완성까지 보장하지는 않을 것이다. 서종태는 자신의 계급적 지위에 안주하는 인사들과는 결이 달랐다. 우선 그가 수행한 정치가로서의 발언과 정책 그리고 정치를 통해 추구하는 가치에 주목해보자.
파주시 장단면 도라산에 있는 영의정 만정당 서종태의 묘갈. 묘갈은 무덤 앞 동남쪽에 세우는 윗부분이 둥근 비석을 뜻한다. 비무장 지대에 있는 묘갈을 2008년경 수색 군인이 촬영한 것이다. [사진 대구 서씨 대종회]
“언로 넓혀야” 왕에게 상소 30대의 젊은 시절, 교리(校理·정5품) 서종태는 시폐(時弊·시대의 폐단) 9조를 작성하여 왕에게 올린다. 눈길을 끄는 조항을 보면 그의 정치철학이 곧 인생 철학이라는 점이다. ①재용(財用)을 절약하고, 귀근(貴近)한 집에 지나친 하사를 삼갈 일②노성한 선진(先進)과 연소한 사류(士類)의 갈등을 줄이기 위해 호오(好惡)를 공정히 하여 조정 분위기를 화목하게 할 일③왕이 의론을 막고 저지하니 신하들의 사기가 떨어지므로 언로(言路)를 넓혀서 강직한 기운을 기를 일④백성들이 궁핍하니 장률(贓律)을 엄중하게 하여 탐오(貪汚)를 바로 잡을 일.(숙종 12년 2월 29일) 서종태의 졸기(卒記)에는 “자기 단속이 청렴하고 엄정하여 으레 하는 부의나 선물이 조금 많으면 물리쳤다”고 한다.(숙종 45년 2월 21일)
당쟁이 가장 격렬했던 숙종조에서 서종태는 당쟁을 완화시키고 당색과 무관한 인재(人才) 선발을 주장했다. 정치는 정책을 다루어야지 당파적 의리가 쟁점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입장이었다. 좌의정으로 국정 운영의 책임이 주어지자 먼저 나라를 위해 일할 인재에 주목했다. 그는 인재를 채용하는 시스템을 문제 삼았다. 즉 영남은 땅이 넓고 문풍(文風)이 왕성하여 과거(科擧)한 사람은 매우 많지만 벼슬하는 사람은 적음을 지적했다. 다들 자리가 없어 서용하지 못한다는 이유를 댄다. 하지만 자리가 없는 이유는 음관(蔭官)이 번성하여 명문가 자제들이 많이 차지하여 과거 급제자에게 자리가 돌아가지 않기 때문이라고 한다.(숙종 35년 9월 12일)
큰 시비 당하면 할 말 하는 성격 그야말로 고관대작이 즐비한 대구 서씨 가문의 일원에다, 친시(親試)는 ‘한강을 넘지 않는다’는 말이 돌 정도로 서울의 사족(경화사족) 몇 가문이 정계를 장악하던 시대였다. 그런데 지역 기반이 서울과 그 주변이고 친인척 또한 노론 일색인 그가 경상도 인재를 링 위로 올려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서종태는 지론이 과격하지는 않았지만 큰 시비(是非)를 당하면 거리낌 없이 할 말 다하는 성격이었다.” 그의 졸기에 나오는 말이다.
그는 소론 탕평파의 정치 노선을 충실하게 구현했다. 이는 사대부 양반이 스스로의 계급적 이익을 양보하거나 포기하는 것을 전제하는 정치론이다. 정치에서 가장 어려운 일은 원칙을 견지하면서 반대 세력과 화해하고 포용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서종태는 탕평론을 견지하면서 화해와 포용을 몸소 실천하여 역사를 진전시킨 정치인으로 기억되었다.(김용흠, ‘서종태의 정치 활동과 탕평론’, 2020)
서종태의 탕평정책은 대를 이어 계승되는데 아들 서명균(1680~1745)과 손자 서지수(1714~1768)가 영정조대 정승으로 활약한 것이다. ‘3대 정승’을 배출한 집안이 되었다. 한 가문에서 한 사람 나오기도 하늘의 별 따기라고 하는 정승과 문형(文衡)이 연달아 나오는 이 가문. 경화사족 대구 서씨의 특혜가 작용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것으로만 가문의 영광이 담보될 수는 없을 것이다. “온화하고 겸손하며 신중하고 치밀할 뿐 아니라 뜻이 깨끗하고 행실이 닦여 있다.” “문아(文雅)가 여유 있고 의론이 화평하다.” 이렇게 서종태를 설명하는 언어는 겸손과 공손, 온화함과 신중함, 수양에 철저함 등이다.
서종태의 삶으로 들어가면 정승이라는 높은 지위와 별개로 움직이는 한 개인, 한 가족을 만나게 된다. 쉰을 바라보던 서종태는 아들 서명륜(1672~1699)을 잃은 슬픔을 기록으로 남겼다. “나 서종태에게 아들이 넷 있었으니…”로 시작하는 묘지(墓誌)는 28세의 나이로 죽은 장남 명륜을 위로하고 그가 살다간 흔적을 기억하고자 한 것이다. 무엇보다 조정 일로 바쁜 자신을 대신하여 자신의 어머니를 돌본 아들에게 고마워했다.
“아들은 아침저녁으로 (내 어머니의) 곁을 지키며 음식을 챙기고 따뜻하고 차가운 것을 살펴 드렸다.”(‘망아묘표음기(亡兒墓表陰記)’)
자식을 가슴에 묻은 아버지의 비애는 죽는 순간에도 끝나지 않았다.
“내가 죽은 후에 선친의 묘소 아래와 죽은 아들의 무덤 뒤 수십 보 사이에 나를 묻어준다면 땅속이 이 세상과 같아서 나의 애통한 마을을 위로할 수 있을 것이다.”(‘시제아서(示諸兒書)’)
덧붙이기를 지관이 길흉에 관계된다고 한다면 할 수 없지만 가능한 내 뜻을 따라 주면 좋겠다고 한다.
서종태의 친필 간찰. [사진 대구 서씨 대종회]
서종태의 삶과 사상이 담긴 『만정당집』 18권에는 국정 운영에 관한 글을 비롯하여 시와 기행문 등의 문학 작품들, 간찰과 제문 등의 실용문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장르가 망라되어 있다. 분명한 것은 가진 자들이 자칫 걸려드는 오만과 탐욕과는 거리가 먼 삶이었다. 자식들에게 주문한 것 역시 누구나 꿈꾸는 부귀영화와는 거리가 멀었다.
『만정당집』의 바탕이 된 필사본 초고의 표지(위)와 본문. 직접 편집한 자편(自編) 문집이다. [사진 규장각]
“아들아! 강을 건널 때 바람이 세거나 배에 먼저 탄 사람이 많아 위험하다고 생각되면 비록 긴급한 일이 있더라도 건너지 마라. 절대도 따라 들어가지 말고 물러나 기다리거나 집으로 돌아가거나 근처에 유숙하도록 하라. 안전을 우선하라. 밤길은 도적이나 짐승으로 위험하니 조심하라.”(『만정당집』 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