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정숙은 태어나서 “엄마” 소리 한 번 못 해봤다. 아버지는 일본군 쇠고랑에 차여 징용에 끌려갔다. “세 밤만 자고 있어. 금방 올게” 했던 아버지는 아무리 목 놓아 울어도 오지 않았다.
세 살 되던 해, 1933년 그의 곁엔 아무도 없었다.
고아원은 지옥이었다. 밥 대신 우유를 대야에 풀어서 줬다. 오랫동안 썩어서 굳어버린 우유를….
어른들은 딱딱하게 굳은 우유를 망치로 깨부숴서 한 주먹씩 나눠 줬다. 이걸 먹은 애들 다섯이 눈앞에서 죽었다. 어린 정숙은 배를 곯아 5일 내내 벽에 붙은 흙을 뜯어 먹었다.
딱 죽겠다 싶을 때 강냉이 가루로 쑨 죽을 받았다. 고사리손으로 받쳐 든 접시가 엎어져 죽을 쏟으면, 몇 날 며칠을 하릴없이 손가락만 빨아야 했다.
탄자니아에 학교와 우물을 기증한 문정숙(95)씨가 전남 영암 자택에서 중앙일보와 인터뷰하고 있다.
‘나를 왜 이 세상에 태어나게 했을까….’ 하늘을 원망했다.
어느 날, 하늘이 살며시 봄날을 선물했다.
나이 열일곱, 첫사랑이었다.
26살이던 그 남자는 피아노를 만드는 사람이었다. 자기가 만든 피아노를 백화점에 팔면서 애지중지 귀한 자식 떠나보내듯 엉엉 울던 그 모습에 마음이 동했다.
그 남자가 군대에 가던 날은 아직도 눈에 선하다.
“아무리 사는 게 힘들어도 좀만 더 고생하고 있어. 내가 제대하고 나면 숙이 너, 내 무릎에 어화둥둥 앉혀서 내가 먹여 살릴 거야.”
둘은 “1947년 2월 23일 오후 3시 용산역에서 보자”고 약속했다. 그러나 약속의 날, 문정숙은 집 밖으로 한 발짝도 나가지 못했다.
양엄마가 “어떤 놈인 줄 알고 만나려고 하냐”며 그를 집에 가뒀다. 그 길로 간질병 앓는 남자에게 몇만원에 팔아버렸다.
그러나 소녀 문정숙은 모진 시집살이를 참지 않았다. 시부모 밥상을 뒤엎고 혼인신고서를 박박 찢어 아궁이에 불태웠다.
문정숙이 아궁이에 혼인석약서를 찢어 버리는 모습
“남이 정해준 길은 두 번 다시 걷지 않겠다.” 시댁 문을 박차고 나온 문정숙은 다짐했다.
하지만 바깥세상은 더 가혹했다.
문정숙은 생존하기 위해 닥치는 대로 일해야 했다. 대소변을 가리지 못하는 치매 노인을 간병하고, 폐품을 주워다 팔았다. 산후조리원, 가사도우미 등 안 해본 일이 없었다.
돈 버는 정보도 몰랐던 그 시절, 문정숙은 자신만의 재테크 방법을 일찌감치 깨우쳤다.
돈을 모은 지 8년 만에 목돈을 손에 쥐었고, 커다란 경기도 땅 주인이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