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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 호르무즈가 불러온 공급망 위기, 에너지 안보 새 틀 짜자

중앙일보

2026.05.03 08:26 2026.05.03 1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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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 유가가 고공행진하면서 석유 최고가격제 시행에도 서울 휘발유 평균 가격은 L당 2000원을 훌쩍 넘겼다. [뉴스1]

국제 유가가 고공행진하면서 석유 최고가격제 시행에도 서울 휘발유 평균 가격은 L당 2000원을 훌쩍 넘겼다. [뉴스1]

이란전쟁 발발 두 달여. 호르무즈해협 봉쇄로 이어진 전쟁은 원유 가격을 수직으로 끌어올리며 세계경제를 순식간에 위기로 몰아넣었다. 중동산 원유 의존도가 높은 한국 경제가 입은 충격이 유독 컸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는 곧바로 성장률 전망치를 기존 2.1%에서 1.7%로 뚝 떨어뜨렸다. JP모건도 한국을 유가 변동에 가장 취약한 국가로 지목했다.

김영희 디자이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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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에너지기구(IEA)는 전쟁이 끝나도 에너지 수급 환경은 전쟁 이전으로 돌아가기 어렵다고 밝히고 있다. 한국의 에너지 공급 안정성도 새로운 차원의 시험대에 올랐다.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면 에너지 안보의 틀을 다시 짜야 한다.

호르무즈해협을 봉쇄한 이란 혁명수비대의 고속정이 지난달 21일 해협 통과 선박에 접근하고 있다. [AFP=연합뉴스]

호르무즈해협을 봉쇄한 이란 혁명수비대의 고속정이 지난달 21일 해협 통과 선박에 접근하고 있다. [AFP=연합뉴스]

석유·가스 자주개발률 한국 10.8%, 일본 42.1%
에너지 안보의 황금률은 다각화다. 에너지 조달이 특정 국가, 특정 경로에 쏠릴수록 리스크는 커진다. 수입선을 다변화하고 도입 경로도 훨씬 다양화해야 한다. 노력을 안 한 건 아니다. 2000년대 중반까지 90%에 달하던 중동산 원유 비중이 69% 수준까지 떨어졌다. 최근 미주·아프리카 등에서 물량을 확보하며 56%까지 낮아졌다고 한다. 하지만 충분하다고 할 수 없다. ‘탈호르무즈’ 전략도 긴요하다. 이미 육상 송유관이 호르무즈의 대체 수송로로 떠올랐다. IEA가 튀르키예와 이라크를 잇는 송유관 건설을 제안했고, 이라크-쿠웨이트-사우디아라비아-오만을 잇는 1800㎞ 초장거리 송유관도 거론되고 있다. 송유관 건설 초기 단계부터 직간접적으로 참여해 원유 도입 물량을 확보할 필요가 있다. 산유국 석유를 국내 유휴 비축시설에 보관해 주는 국제공동비축 사업도 적극 확대해야 한다. 수급 위기 발생 시 우리 정부가 필요 물량을 먼저 살 수 있는 우선구매권을 확보하는 식의 책략이 필요하다.

정근영 디자이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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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국가적 차원의 노력을 집중해야 할 분야가 해외 자원 개발이다. 해외 개발로 자원을 확보하면 국내 부존자원과 같은 효과를 낼 수 있다. 그러나 우리 현실은 암담하다. 2024년 석유·가스 자주개발률(국내외 개발·확보량을 국내 소비량으로 나눈 비율)은 10.8%. 2015년 15.5%에서 후퇴했다. 일본의 자주개발률은 42.1%. 2008년 19.6%에서 배 이상 늘었고 2040년 60% 이상을 목표로 한다.

정근영 디자이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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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 이런 격차를 낳았을까. ‘정치 외풍’과 전문성이 결정적 차이다. 일본은 정권과 관계없이 자원개발기구에 힘을 실어줬다. 경제산업성 산하 에너지·금속광물자원기구(JOGMEC)는 요원 1000여 명 중 70% 이상이 지질학·공학 박사와 투자은행(IB) 출신 전문가로, 2년마다 부서를 옮기는 공무원과 달리 한 분야에서 수십 년간 전문성을 쌓는다. 우리는 이명박 정권 이래 자원개발이 정권을 따라 ‘냉·온탕’을 오가다 결국 적폐로 낙인 찍혀 외면받았다. 광물자원공사는 자본잠식 끝에 광해광업공단으로 통폐합됐다.

박경민 기자

박경민 기자

원전 추가 건설은 변수가 아닌 상수
에너지 안보 ‘새 판 짜기’의 첫 시험대는 이제 본격적 논의가 시작된 12차 전력수급기본계획(전기본)이다. 기후에너지환경부에 따르면 2040년 전력 소비량은 직전 계획인 11차 때보다 최대 70TWh 가까이 증가한다. 서울시 연간 전력 소비량의 1.4배, 신규 원전 3~7기가 필요한 규모다.

정근영 디자이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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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를 무엇으로 채울 것인가. 우려스러운 건 주무부처인 기후부가 ‘재생에너지 일변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재생에너지 확대는 필요하지만 문제는 현실성이다. 한국의 태양광 보급률은 이미 세계 최고 수준이어서 추가 확대 여지가 크지 않다. 무엇보다 재생에너지의 치명적 약점인 간헐성을 어떻게 보완해 전력을 안정적으로 공급할지 만만찮은 숙제가 있다. 게다가 재생에너지 설비의 중국산 의존은 어떻게 할 것인가. 설비 국산화 없는 재생에너지 집중은 자칫 안보 리스크 확대로 이어질 수 있다.

세계 각국은 원전에 주목하고 있다. IEA에 따르면 건설 중인 세계 신규 원전 용량은 30년 만에 최고 수준이다. 원전 총설비 용량도 2035년까지 최소 35% 이상 증가할 전망이다.

호르무즈 쇼크로 에너지 환경이 급변한 만큼 12차 전기본은 정권의 선호나 부처의 논리를 뛰어넘어야 한다. 에너지 안보와 미래산업의 경쟁력을 담보할 현실적인 에너지믹스가 필요하고, 그러자면 추가 원전 건설이 불가피하다는 게 대다수 전문가의 권고다. 원전은 건설에만 15년 가까이 걸린다. 당장 원전 추가 건설에 대한 공론화에 착수해야 하고, 얼마나 필요할지 구체적인 검토를 서둘러야 한다.

통합관리 불가능한 ‘전력 따로, 석유·가스 따로’
모든 안보 사안이 그렇듯 에너지 안보의 최상위 질문은 ‘누가 책임자인가’ 하는 것이다. 이번 위기 대응 과정에선 컨트롤타워의 공백이 두드러졌다. 현재 경제안보 부서는 재정경제부와 산업부, 외교부 등으로 산재해 있다. 공급망안정화기본법의 주무부처는 재경부지만 자원안보특별법의 주무부처는 산업부다. 인력과 자료는 여러 부처와 산하기관에 흩어지고 뒤엉켜 있는 상태다. 문제는 이를 조율할 컨트롤타워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한 공급망 전문가는 “지난 정부에선 대통령실의 안보실 3차장이 부처 간 조율을 하며 보완했지만 현 정부에선 그마저도 뚜렷한 역할이 보이지 않는다”고 말했다. 총리 주재 비상경제본부 회의가 열리고 있지만, 사후 대응용일 뿐 곳곳에 잠재한 초크 포인트(Choke point·핵심적 병목 지점)를 점검하고 대비하긴 역부족이다. 책임과 권한이 모호하다 보니 임기응변과 혼선이 잇따랐다. 위기경보 심각 단계에나 쓸 수 있는 석유 최고가격제가 초기 국면에 돌출한 게 대표적이다. 이는 수요억제 정책과 충돌하며 엇박자를 낸 것은 물론 향후 위기가 심화할 경우 쓸 수 있는 카드를 소진해 버리는 결과를 낳았다.

에너지 통합관리 체계에서도 문제가 노출됐다. 현재 에너지 정책 기능은 산업부에서 기후부로 넘어간 상태다. 하지만 이번 위기에서 기후부의 존재감은 미미했다. 총리 주재 비상회의에선 산업부 장관이 에너지 수급 반장을 맡았다. 이유가 있다. 기후부가 에너지 정책 기능과 전력을 떼어갔지만 석유·가스와 원전 수출정책 기능은 산업부에 남겼다. 결과적으로 통합관리가 불가능한 ‘전력 따로, 석유·가스 따로’의 기형적 체제가 됐다.

박경민 기자

박경민 기자

에너지 안보 컨트롤타워는 우리와 경제 환경이 유사한 일본의 사례를 참고할 만하다. 일본은 2010년 센카쿠열도 사태 때 중국의 희토류 수출 금지로 위기를 겪은 이후 국가적 대응체계를 전면적으로 개편했다. 경제안보상을 따로 두고 외무·국방·산업 부처가 내각부 산하 경제안보추진실이라는 하나의 컨트롤타워 아래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체계를 만들었다. 이는 일본이 중국 희토류 의존도를 90%대에서 60%대까지 낮춘 제도적 토양이 됐다. 다카이치 총리가 2대 경제안보상이었다. 그는 2022년 경제안보상으로 부임한 이후, 경제안전보장추진법이 현장에서 실효성을 가질 수 있도록 세부 시행령을 설계하고 공급망 감시 대상을 확대하는 법 개정을 주도했다.
정부 조직개편 때엔 지금의 에너지 위기 상황을 상상하지 못했을 수 있다. 하지만 세계 공급망 질서에 구조적 급변이 닥친 만큼 국가 대응체계를 다시 세워야 한다. 정권이 힘 있을 때 에너지 부문 정부 조직개편을 새로 하는 것도 방법이다. 기형적 에너지 관리체계를 시급히 보완하고, 상시적이고 강력한 에너지 안보 컨트롤타워를 구축해야 한다.

위기가 왔을 때 적극 대응한 나라는 살아남았고, 우왕좌왕한 나라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지금이 바로 에너지 안보의 새 판을 짤 기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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