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고닫기

[양성희의 문장으로 읽는 책] 온갖 근심

중앙일보

2026.05.04 08:04 2026.05.04 14:41

  • 글자크기
  • 인쇄
  • 공유
글자 크기 조절
기사 공유
양성희 문화칼럼니스트

양성희 문화칼럼니스트

“이 방들의 질긴 삶은 짓밟힐 수 없었다. 삶은 아직 거기 있었다. 아직 박혀있는 못에도 남아 있었다.” 열에 아홉은 릴케의 한 구절일 것이다. 울리히 삼촌은 가족 모임에서 릴케를 자주 인용한다. (중략) 삼촌이 웅얼거리는 소리가 여전히 들린다. “우리가 붙들고 씨름하는 것들이 얼마나 하찮은가요. 우리를 붙들고 씨름하는 것들이 얼마나 위대한가요.” 지금 저 구절은 확실히 릴케이다.
-마리아나 레키의 『온갖 근심』 중에서.

제목부터 좋았다. ‘온갖 근심’이라니. 우리 삶을 딱 두 단어로 응축했다. 마리아나 레키(사진)는 따뜻한 문체와 위트로 인생의 소소한 국면들을 스케치하는, 독일의 여성 작가다. 한 심리학 잡지에 연재했던 짧은 글들을 묶은 책이다. 작가의 분신처럼 보이는 40대 여성이 가족, 이웃, 친구들과 일상의 고민들을 나눈다. 명상 수업에 가보니 “모두의 내면은 반짝반짝 광이 나는데 우리 내면만 엉망진창인 것 같았다.” 최고 인기 여학생에게 고백했다 까인 소년은 “그렇게 냅다 달리는 동안 모든 것이 출렁거렸다. 용기와 뱃살뿐 아니라 비천한 인생 전부가.” 이삿짐을 싸던 “울리히 삼촌은 이제 금방 대형 쓰레기로 내어놓을 것이 낡은 가구가 아니라 자기 자신인 양 카우치를 쳐다본다.” 작가에 대해 독일 언론은 “그녀의 행복은 흔한 단맛이 아니며, 그녀의 불행은 호들갑스러운 쓴맛이 아니다”라고 호평했다.

책 제목과 똑같은 ‘온갖 근심’이라는 글은 첫사랑 소녀의 실연에 대한 이야기다. “리자는 열여섯 살이고 지난 몇 주간 내내 그랬듯 이만저만 크지 않은 실연의 아픔을 데리고 나온다. 아니, 실연의 아픔이 리자를 데리고 나온다는 말이 더 옳다. 실연의 아픔이 리자를 데리고 다니고, 거인 같은 그 실연의 아픔에 가려서 리자가 거의 안 보일 지경이다.”

소녀에게 무슨 위로의 말을 할까. “지나갈 거야. 폴씨와 나는 생각한다. 16살 소녀가 겪는 실연의 상심 뒤를 따라 걷다 보면 제일 먼저 그 말이 떠오르기 때문이다. 머리를 스쳐 지나가는 또 하나의 말은 죽을 힘을 다해서 꾹 참는다. 훨씬 더 나쁜 일이 닥칠 거야, 라는 말.”

양성희 문화칼럼니스트


많이 본 뉴스

      실시간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