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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태균의 역사와 비평] 엇박자 국정 운영, 뿌리 깊은 부패 사슬 못 끊어 추락

중앙일보

2026.05.04 08:10 2026.05.04 14: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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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권 초 지지율 90%였던 김영삼 정부 실패의 교훈
박태균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

박태균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

1987년 한국의 민주화 못지않게 1993년 김영삼 정부의 출범은 한국 사회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1990년 김영삼 후보가 김종필과 함께 여당인 민정당과 합당하여 한국의 첫 보수정당인 민주자유당을 창당하였고, 여당의 후보로 대통령에 당선되었지만, 그는 한국 현대사에서 야당 지도자의 상징이었다.

선명 야당 내세웠던 YS, 대선 앞두고 3당 합당 후 민주자유당 후보 나서
집권 초반 부패 청산 내걸고 공직자 재산공개, 금융실명제로 인기 올라
장기수 송환하며 평화 노선 추구했으나 남북 정상회담 실패 뒤 지지 급락
개혁 과정서 과거 여당 세력 거센 반발…고질적 부패 청산 실패해 침몰

ChatGPT를 이용해 생성한 이미지와 합성해 만든 이미지 그래픽.

ChatGPT를 이용해 생성한 이미지와 합성해 만든 이미지 그래픽.

1969년 삼선개헌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김영삼은 40대 기수론을 내세워 김대중·이철승과 함께 정국을 돌파했다. 비록 대통령 후보로 선출되지는 못했지만, 유신 이후 엄혹한 상황 속에서도 선명 야당을 내세운 민주화의 한 축이었다. 1975년 남베트남 패망 직후의 영수회담의 아쉬움이 있었지만, 김대중이 원외의 상징이었다면, 김영삼은 원내의 사령탑이었다.

닭의 모가지를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
깡패가 동원된 각목 전당대회 속에서도 김영삼은 선명 야당을 내세웠고, “닭의 모가지를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라는 명언을 남기면서 1978년 총선을 승리로 이끌었다. 총선 승리는 유신체제가 종말을 고하는 신호탄이었다. 1980년 서울의 봄이 실패하면서 그는 또 한 번 암흑시대를 맞이했지만, 단식투쟁과 민주산악회를 통해 1985년 총선과 6·10 항쟁을 이끌었다.

1987년 야당의 분열로 인한 대통령 선거에서의 실패, 1988년 총선에서 제3당으로의 추락 때문이었을까? 그는 야당으로서 대선 승리가 어렵다고 판단했고 호랑이를 잡기 위해 호랑이 굴로 들어갔다. 3당 합당을 통해 민주자유당이 창당되었고 한국 정치가 보수와 진보 구도로 바뀌는 중요한 계기가 되기도 했다.

물론 여당 안에서 대통령 후보가 되기도 쉽지 않았다. 김종필은 약속했던 내각책임제로의 개헌을 주장했다. 구 민주정의당 세력은 김영삼을 신뢰하지 않았다. 이 과정에서 현대의 정주영 회장이 대선 후보로 출마했다. 부산 지역의 기관장들이 모여 김영삼 후보를 지원해야 한다는 부산 복집 사건이 터지기도 했다.

금융실명제와 부패청산
그는 이러한 난관을 뚫고 결국 대통령이 되었다. 미국 대사관은 만약 그가 대통령이 되지 않았다면 ‘변절한 민주화 투사로서 역사의 희생양’이 되었을 거라고 보았다. 물론 많은 사람이 그의 국정운영 방향뿐만 아니라 능력에 대해서 의문을 품었다. 평생 야당에서 민주화운동을 했던 그가 국가를 이끌어갈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을까?

김영삼 대통령의 지지율은 집권 초반 90%에 달했다. 공직자 재산공개로부터 시작하여 부패를 청산하여 신한국을 만들겠다고 선언했다. 공직자윤리법을 제정했고, 금융실명제를 통해 ‘검은돈’의 흐름을 끊겠다는 의지도 보여주었다. 부패 청산은 규제를 풀고 한국 기업들이 세계적 경쟁력을 갖춘 기업으로 성장하는 데 있어서 중요한 고리가 될 수 있었다.

외교적으로 노태우 정부의 평화정착 노선을 이어가고자 했다. 정권 초기 통일부 장관 인선은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었고, 장기수를 아무 조건 없이 송환하기도 했다. 남북관계에 평화 공존 체제를 만들겠다는 의지를 보여준 것이었다. 북한 핵 문제가 본격적으로 제기되기 시작했던 시기였기에 전 세계가 김영삼 정부의 움직임에 주목했다.

1994년 초까지의 높은 지지율은 하반기로 가면서 급락했다. 50% 미만으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남북정상회담의 무산과 그에 이은 조문 파동이 주요한 이슈가 되었고, 정치개혁의 결과에 대한 국민적 실망 역시 지지율 하락의 주요 요인이 되었다. 내로남불이라는 단어도 이즈음 나타나기 시작했다.

정부의 두 목소리
최근 공개된 미국 문서에 의하면 김영삼 정부의 실패는 어느 정도 예정된 것이었을 수도 있다. 개혁의 과정에서 이루어진 율곡사업 스캔들(방산비리), 평화의 댐 부조리에 대한 조사, 12·12 쿠데타와 광주항쟁에 대한 조사, 하나회 숙청 등이 여당의 한 축을 차지하는 과거 여당 세력의 광범위한 반발을 불러왔기 때문이었다.

대선 후 경쟁자들에 대한 조사, 재산공개 과정에서 여당 내 주요 정치인들의 사퇴로 인해 ‘토사구팽’이라는 사자성어가 유행했다. 이러한 위기는 정권 초기부터 예상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첫 번째 문제는 탑다운(Top-down)의 정국 운영이었다. 효율적인 방법이었지만, 광범위한 공감대를 형성하지 못하고 정치보복이라는 부정적 소문을 만들어냈다.

대통령과 정부의 비전에 실무 관료들이 동의하지 않는 상황도 발생했다. 미국 정부는 이 점에 매우 민감했다. 이미 노태우 정부 대북정책과 관련하여 고위 관료가 대통령의 훈령을 조작하는 사건을 겪었기 때문이었다. 북한 핵 문제 해결이 중요했던 미국에게 대통령의 입장이 우선적 고려사항이었지만, 이를 현장에서 실행하는 핵심 관료들의 입장도 중요했다.

김영삼 정부 출범 초기 미 대사관의 주요 인사들이 관료들을 만났다. 미국은 남북관계의 진전과 대북 문제에서 한미 간의 협력을 강조했다. 그러나 핵심 관료들은 2년 전에 있었던 남북기본합의서가 이행될 가망은 전혀 없다는 입장을 보였다. 미국은 대북포용 정책이 갖는 장기적 이익을 강조했지만, 한국의 관료들은 이에 대해 회의적인 태도를 보였다.

미국 투자자와 한국의 부패
두 번째 문제는 부패 척결에 대한 부정적 전망이었다. 당시 한국 사회에는 촌지 문화가 뿌리 깊게 자리 잡고 있었다. 당시는 우루과이 라운드 논의와 세계무역기구(WTO) 설립이 진행되던 시기였기 때문에 경제 중진국으로 성장하고 있었던 한국의 입장이 미국에 매우 중요했다. 또한 한국은 붕괴한 동유럽 국가의 미래를 위한 성장 모델이 되는 국가이기도 했다.

이 중에서도 우루과이 라운드의 의제들은 시장 접근, 섬유, 농업, 지식재산권, 서비스 등 국내 여론을 흔들 중요한 사안들이었다. 1970년대 초 섬유 쿼터제, 1986년 미국과의 지식재산권 합의가 있었지만, 농업 문제는 여론의 핵심적 관심 사항이었다.

이때 미국은 한국 내 부패에 주목했다. 이미 1960년 4·19 혁명 직후 미국은 장면 정부에게 공무원과 경찰의 봉급 인상을 요구한 바 있다. 한국과 같이 많은 규제가 있는 국가에서 부패는 기업과 관료, 그리고 정치인 사이의 불공정한 관행을 만들어내고, 이는 해외 자본의 진입을 막는 중요한 요소라고 판단했다.

미 대사관은 ‘김영삼 반(反)부패-불가능한 꿈’이라는 문건을 작성했다. 이 문서에 따르면 한국 사회의 부패는 인적관계와 네트워킹을 위해 식사나 유흥 접대, 다양한 종류의 선물을 주기적으로 교환하는 것이 가장 기본적인 바탕이 된다고 파악했다. 누군가 군부대나 병원을 방문하면 두툼한 봉투를 남기고 가는 것이 관행이었다.

촌지의 추억
이러한 관계를 바탕에 둔 크고 작은 청탁을 우정의 정상적인 과정으로 간주하며, 제공된 금품이 조직의 운영자금으로 사용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이 관계를 비공식적인 고용관계로 표현하기도 했다. 여기에는 기업과 관료, 정치인과 법조인만 등장하는 것이 아니라 기자와 교수, 그리고 교사도 등장했다. 수서 아파트 스캔들이나 교육계의 촌지 역시 또 다른 사례였다.

부패의 청산은 해외자본의 입장에서도 한국 진출을 위한 벽을 낮추기 위해 매우 중요한 개혁이었다. 또한 한국기업들을 위해서도 급행료와 규제철폐가 필요했다. 그러나 남북관계에 대한 입장과 마찬가지로 한국 정부의 담당관들과 전문가들은 성공 가능성을 매우 낮게 보았고, 혁명이 아니면 불가능하다고 판단했다.

수입허가로부터 전기 규격, 대학입시 절차에 이르기까지 ‘비공식 급행료’가 필요한 한국 사회에 대해 이 문서는 ‘규칙의 확산이 갈취범의 즐거움’으로 이어진다고 결론을 내렸다. 정부의 많은 홍보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이 과거와 다를 바 없는 상투적인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것이다. 개혁의 진정성은 변화에 대한 저항에 의해 후퇴하고 있었다.

지금은 어느 정도 변화했는가?
이상과 같은 두 가지 요소는 어쩌면 1997년 한국이 금융위기를 맞는 데 중요한 배경이 되었을 수 있다. 정부의 정책 입안과 실행에서 손발이 맞지 않았던 문제, 부실기업에 대한 지원 등이 모두 이러한 문제로부터 시작된 것은 아니었을까? 그런데도 부패 해결을 위한 김영삼 정부의 노력은 높이 평가받아야 한다는 것이 보고서의 결론이었다.

2016년 김영란법이 만들어졌다. 그러나 한국 사회는 아직도 불공정한 관계의 문화로부터 자유롭지 않다. 30년 전 미국 자본의 한국 투자가 중요한 사항이었지만, 이제 한국 자본의 미국투자가 중요한 시대로 바뀌기도 했다. 그럼에도 김영삼 정부에서의 경험은 지금 한국 사회의 고질병을 고치려는 현 정부에게 많은 교훈을 주고 있다.

박태균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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