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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 친모 일본인설에…‘이명박’ 그 이름의 비밀 꺼냈다

중앙일보

2026.05.04 14:00 2026.05.04 1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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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박 회고록


제3회 ‘귀국선’과 ‘6·25’…끝 모를 가난의 시작


1941년 12월 19일, 나는 오사카의 조선인 마을(오사카시 히라노구 가미나미 후쿠이도정)에서 태어났다. 식민지 노동자들이 모여 살던 빈민촌이었다. 내 위로 큰누이 귀선(1930~2010)과 큰형 상은(1933년생), 작은형 상득(1935~2024년), 작은누이 귀애(1938~50년)가 있었고, 아래로 여동생 귀분이 있었다. 막내 남동생 상필(1946~1950)은 귀국 후 포항에서 태어났다.

어머니(채태원·1909~64년)는 치마폭에 보름달이 들어오는 태몽을 꾼 뒤 ‘밝을 명(明), 넓을 박(博)’을 내 이름자로 지어주셨다. 다만 족보상에는 돌림자를 딴 ‘상정(相定)’이라는 이름이 올라 있다. 그런데도 2007년 대선 때 “돌림자를 쓰지 않은 걸 보니 친어머니가 일본 사람일 것”이란, 가짜뉴스가 퍼졌다. 결국 유전자 검사까지 받아 거짓을 바로잡았다.

아버지(이충우·1907~82년)는 경주 이씨 집성촌인 경상북도 흥해군 북상면 덕곡동(현 포항시 북구 흥해읍 덕성리 덕실)에서 삼 형제 중 막내로 태어났다. 목부(牧夫)였던 아버지는 돈을 벌기 위해 일본으로 건너가 오사카 근교의 한 목장에서 일했다.

해방이 되자 부모님은 나를 포함해 6남매를 부둥켜안고 일본 시모노세키항에서 허름한 목조 어선에 올라탔다. 1945년 11월이었다. 짐 속에는 10여 년간 일본에서 갖은 핍박과 설움을 견디며 번 종잣돈이 있었다. 긴 기다림 끝에 오른 배 안은 발 디딜 틈조차 없었다. 정원을 한참 넘겼다. 거기서 나는 생과 사의 경계를 처음 마주했다.
광복 이후 일본에서 고향으로 돌아가려는 사람들로 귀국선마다 인산인해를 이뤘다. 사진 알렉산더 턴불 도서관

광복 이후 일본에서 고향으로 돌아가려는 사람들로 귀국선마다 인산인해를 이뤘다. 사진 알렉산더 턴불 도서관


" 어쩔 수 없다. 각자 뭍으로 올라가자. 살 사람은 어떻게든 살 테니. "

어머니는 절박했다. 귀국선은 대마도(對馬島·쓰시마섬) 앞바다에서 좌초했다. 심하게 기울더니 서서히 물속으로 잠기고 있었다.

어머니 혼자 6명의 자식과 십여 년의 타향살이 결과물인 짐보따리를 건사한다는 건 불가능했다. 비장한 결단을 내렸던 이유다. 핏덩이였던 귀분은 큰누이 귀선이 목숨을 건 채 둘러업지 않았다면 살아남지 못했을 수도 있었다.

그런 절체절명의 순간, 선두에서 이고 지고 업은 채 길을 내야 할 아버지가 보이지 않았다. 그때 들어 올려진 배의 후미, 선장실에서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아버지였다.

" 여러분, 이런 때일수록 질서 있게 행동해야 합니다! 안 그러면 다 죽습니다! "

가족이 죽을 지경인데, 아버지는 동포를 살리겠다며 선공후사의 정신을 실천하고 있었다. 하지만 어쩌랴. 아버지는 그런 사람이었다.

훗날 광목천 장사를 할 때도 다들 하던 ‘길이 조작’을 차마 못 해 손해만 봤을 정도로, 어찌 보면 요령이 없는 분이었다.

하지만 나이가 차면서 점점 그를 이해하게 됐다. 그런 아버지를 보고 자랐으니, 우리 형제들에게도 때로는 요령 없어 보일 정도로 올곧은 자세와 태도가 DNA처럼 깊이 각인된 것이다.

물론 어머니는 더 말할 것도 없다. 그 지독한 가난 속에서도 어머님의 가르침은 엄격했다.

" 남을 돕고 살아라. 남에게 손 벌리지 말아라. "

동네 잔칫집 일을 도와주러 가서 떡 한 조각 얻어먹고 오면, 어머니의 불호령이 떨어졌다. 그때 그 가르침은 이후 인생을 살아가는 동안 늘 내 마음속에 금과옥조로 남아 있다.

하늘이 도운 덕택에 우리 가족은 모두 살아남았지만, 피땀으로 일군 전 재산이 바다로 빨려 들어갔다. 그렇게 우리는 빈털터리로 고향에 돌아왔다. 설상가상으로 6·25 전쟁이 터졌다. 우리 가족은 큰집이 있는 흥해로 피난했는데, 하필 인민군이 그곳을 점령했다. 그 곳에서 둘째 누이와 막냇동생이 ‘쌕쌕이’로 불리던 미군 전투기의 오폭으로 사망하는 비극을 겪어야 했다.

나 역시 어머니, 여동생과 함께 미군과 북한군의 교전 한 가운데에 갇히는 위기를 맞은 적이 있었다. 어머니는 나와 여동생을 마른 개울 고랑에 차례대로 눕게 하더니 그 위에 당신의 몸을 덮었다. 나는 고집을 부려 여동생을 맨 아래에 눞혔다. 그래서 겹겹이 이불을 덮듯 여동생이 맨 아래에, 내가 그 위에, 어머니가 맨 위에 엎드렸다. 그 밤은 유난히 길었다.

흥해가 탈환된 뒤 포항으로 돌아왔지만 삶은 더 피폐해졌다. 다 무너져가던 산기슭의 절간(포항시 북구 덕산동)으로 거처를 옮겨야 했다. 부엌도 없는 허름한 방 한 칸에 칸막이를 쳐서 다섯 세대, 15명이 모여 살았다. 가장 싸게 구할 수 있는 술지게미(양조장에서 술을 빚고 남은 찌꺼기)로 허기를 달래다 보니 늘 얼굴이 벌겠다.

동지상고를 수석 졸업한 작은형은 서울대 상대 경제학과에 입학했다. 반면 나는 형의 학비를 대기 위해 일찌감치 생활 전선에 뛰어들었다. 포항중학교를 전교 2등으로 졸업했지만, 고교 진학은 언감생심이었다. 그러다가 나를 아꼈던 중학교 영어 선생님이 어머니를 끈질기게 설득한 덕택에 간신히 동지상고 야간부에 진학할 수 있었다.
포항중학교 시절 학생기록부의 사진. 이명박 전 대통령은 유년 시절 사진이 거의 없다. 사진 이명박 대통령 기념재단

포항중학교 시절 학생기록부의 사진. 이명박 전 대통령은 유년 시절 사진이 거의 없다. 사진 이명박 대통령 기념재단


고교 시절 극장 앞에서 과일을 팔다가 지프차가 과일 손수레를 들이받는 사고가 터졌다. 그런데 적반하장이었다.

" 야, 이 자식아. 리어카로 길을 막아? 장사를 하려면 똑바로 해! "

자괴감이 들었다.

‘이런 식으로 살아서 뭐 하나. 내일 가출하자. 일단 오늘 밤에는 팔지 못하게 된 저 과일이라도 가족이 실컷 먹게 해주자.’

다음 날 새벽 4시 여느 때처럼 어머니의 새벽 기도가 시작됐다. 그런데 평소와 달리 나에 대한 기도가 매우 길었다.

" 우리 명박이의 앞길을 하나님께서 인도해 주시옵소서. 건강도 지켜주시고, 명박이가 하는 일도 잘되게 해주시옵소서…. "

사정을 전해 들은 어머니가 나의 가출 의도를 읽었던 것이다. 그 기도의 따스함에 감명받은 나는 가출을 차일피일 미뤘고, 결국 뜻을 접었다.

그런데 얼마 안 있어 정반대 상황이 펼쳐졌다. 부모님이 작은형 뒷바라지를 하겠다며 상경한 것이다. 나는 중학생이 된 여동생과 단둘이 포항에 남아야 했다. 나는 헌 종이로 봉투 30개를 만들어 얼마 안 되던 한 달치 쌀을 소분한 뒤 하루에 한 봉지만으로 죽을 쑤어 먹었다. 훗날 여동생으로부터 “그때 오빠는 너무 지독했다”는 말을 들을 정도였지만 살아남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다. 그렇게 힘들게 하루하루를 버틴 나는 고등학교를 1등으로 졸업한 뒤 부모님의 부름을 받고 상경했다. 서울 살이의 시작이었다. (계속)

“이명박 이름만 돌림자 안썼다” MB, 친모 일본인설에 꺼낸 말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419441




서승욱.박진석.김상진.김기정.왕준열([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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