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산업정책의 시대다. 미·중 패권경쟁과 공급망 재편, 거기다 중동 전쟁이 덮치면서 기존 세계 경제질서가 해체 직전까지 몰리자 각국은 저마다의 생존전략을 치열하게 모색하고 있다. 앞으로 세계 경제 질서에는 어떤 변화가 밀어닥칠까. 우리의 산업전략은 그 격랑을 헤쳐갈 만큼 치밀할까. 원조 ‘산업정책론자’ 장하준(63) 런던대 교수에게 물었다. 그는 『사다리 걷어차기』 『나쁜 사마리아인들』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 등 베스트셀러를 통해 개발도상국의 입장에서 신자유주의 질서와 주주 자본주의를 치열하게 비판해왔다. 한편으론 정부가 주도한 산업화 과정을 옹호하고, 그 속에서 잉태한 재벌체제와의 타협 필요성도 제기했다. 그는 이를 ‘정책적 실용주의’ ‘이론적 다원주의’라 했지만 좌우 양쪽의 협공을 피할 순 없었다.
미국 제조업, 투자 안 하다 붕괴
성과급 논란, 정부도 중재 나서야
머니 무브로 부동산·고령화 해결?
주택 공급과 복지 강화가 정답
장하준 런던대 교수를 지난달 30일 서울 흑석동 중앙대학교에서 만났다. 강정현 기자
지난달 30일 중앙대 경제학부가 주최한 특별강연에 나선 그는 현재 국면을 “미국이 스스로 만든 질서에서 빠져나오다 못해 그 질서를 파괴하고 있는 상황”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결국 미국의 제조업 부활 전략은 성공하지 못할 것이고, 장기적으로는 다른 나라들이 ‘감히’ 미국이 주도하지 않는 세계 경제를 꿈꾸게 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다자질서 유지에 힘 합쳐야
Q : 혼돈의 시작은 미국의 관세 부과였다. 트럼프의 전략을 평가한다면.
A : “한마디로 ‘고령자(高齡者)판 유치(幼稚)산업 보호론’이라 할 수 있다. 과거 한국 등 개발도상국이 쓰던 전략인데 이를 선도국인 미국이 다시 하겠다니 고령자판인 셈이다. 사실 따지고 보면 유치산업 보호란 말 자체가 미국에서 처음 나왔던 것이다. 초대 재무장관인 알렉산더 해밀턴이 당시 패권국인 영국을 겨냥해 만든 말이었다. 그랬던 미국이 태도를 바꿔 자유무역을 주창한 건 세계 제일의 공업 국가에 오른 뒤였다. 그래서 ‘사다리 걷어차기’라 한 것이다. 하지만 상황이 바뀌었다. 미국은 1950년대 세계 제조업 제품 생산의 절반을 차지했지만, 지금은 16% 남짓이다. 한국과 대만의 반도체 없이는 경제가 안 돌아가고, 중국 희토류 없이는 첨단 무기도 못 만드는 신세가 됐다. 그러니 다시 보호무역 장벽을 치고 보조금을 줘서 제조업을 살리겠다고 나선 것이다.”
Q : 결국 성공 못 할 것이라 보는 이유는.
A : “치명적 결함이 있다. 아무리 보호를 하고 보조금을 뿌려도 정작 미국 기업들은 투자를 안 한다. 지난 30여년간 뿌리를 깊게 내린 주주 자본주의 체제 때문이다. 기업들이 돈을 많이 벌어도 투자를 하는 대신 모두 주주에게 돌려준다. 미국은 198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주주환원율이 50%가량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90~95%다. 돈을 빌려서까지 주주에게 나눠주는 기업들도 있다. 투자를 안 하는데 어떻게 생산성이 올라가고 혁신이 되겠나. 오랜 기간 투자가 끊기면서 산업 생태계 자체도 붕괴했다. 과거 한국은 기업을 보호하되 대신 수출액이나 국산화율 목표 같은 조건을 제시했다. 반면 경제개발에 실패한 많은 개발도상국은 그런 조건 없이 단순히 보호만 했다. 그 길을 지금 미국이 따라가는 것이다.”
Q : 그러니 관세를 무기로 한국 등에서 투자와 제조 역량을 끌어오겠다는 것 아닌가.
A : “그러기엔 미국이 너무 크다. 설령 한국·일본·독일이 자국 제조업의 각각 30%씩을 뚝 떼어준다 쳐도 미국의 세계 제조업 비중은 현재 17%에서 21% 정도로 올라갈 뿐이다. 지금보다야 조금 낫겠지만, 트럼프의 구호처럼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만들기엔 어림없는 수준이다. 또 한국·일본이라고 아무리 미국이 팔을 비튼다 한들 자국 제조업 역량을 그렇게 떼어줄 수 있겠나. 그러니 성공 못 한다는 것이다.”
Q : 하지만 현실적으로 한국은 선택지가 많지 않아 보인다.
A : “미국과 중국을 제외한 나라들 입장에선 어떻게든 다자질서를 살려내야 한다. 그렇지 않았다가 패권국들이 힘으로 밀어붙이기 시작하면 어떻게 당해내겠나. 마크 카니 캐나다 총리가 ‘미들 파워(middle power·중견국) 연대’를 주창하는 것도, 개도국 간의 ‘남남협력’의 필요성이 제기되는 것도 다자질서를 유지하고 개선하자는 맥락에서다. 한국도 이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한다.”
Q : 트럼프의 중국 봉쇄에 한국 제조업에는 오히려 기회의 공간이 열렸다는 평가도 있다. 실제로 추격을 받던 반도체도 한숨 돌리고 있는 것 아닌가.
A : “당장은 그런 효과가 있을 수 있다. 하지만 그렇게 만든 보호막이 몇 년이나 가겠나. 만약 미국이 중국을 제대로 밀어내려고 마음을 먹었다면 20년 전에 시작했어야 했다. 지금은 너무 늦었다. 첨단 칩 수출을 규제하고 있지만, 중국이 자국 역량을 결집해 결국 비슷하게 만들어내고 있지 않나. 오죽하면 엔비디아의 젠슨 황도 수출 규제가 중국의 추격을 가속화하는 계기가 됐다고 했겠나.”
기업·직원·주주, 대화로 풀어야
지난달 30일 오후 중앙대학교에서 특별강연을 하고 있는 장하준 교수. 강정현 기자
Q : 당장은 AI(인공지능) 붐에 올라탄 삼성전자·SK하이닉스가 엄청난 이익을 내고 있다. 그러다 보니 직원, 주주, 각종 이해관계자로부터 이익을 나눠달라는 요구도 분출하고 있는데.
A : “이익을 나누는 건 좋다. 하지만 대화와 합의를 통해 조율해가야지 너도나도 달라며 압력을 행사하는 식은 곤란하다. 그 압력에 못 이겨 보너스 많이 주고, 주주 배당 높이고, 자사주 매입하다 경쟁력을 유지할 수 있는 선을 넘어버리면 그때는 다 같이 망한다. 중국이 턱밑까지 쫓아오는 상황 아닌가. 살아남기 위해선 어느 정도 투자가 필요한지, 보너스·배당은 어느 선까지 줄 수 있는지 기업·노동자·주주가 사회적 대화를 통해 답을 찾아야 한다. 다들 조금 더 먹겠다고만 하면 말 그대로 황금알 낳는 거위를 죽이는 일이 되는 결과가 된다. 국가 경제의 명운이 달린 문제인 만큼 정부도 참여해 중재할 필요가 있다.”
Q : 그렇게 되면 정부가 과도한 개입을 한다는 비판을 받지 않겠나.
A : “물론 과거처럼 정부가 힘으로 개입할 수는 없다. 하지만 국민 경제 전체를 보며 중재에 나설 필요는 있다. 반도체 기업이 동네 치킨집이나 중소기업은 아니지 않나. 자칫 이 기업들이 잘못되면 국가 경제 전체가 흔들릴 수 있기에 하는 말이다.”
Q : 지난해부터 이어진 상법 개정으로 소액주주권 강화와 함께 배당 확대, 자사주 소각이 추진되고 있는데.
A : “미국 기준으로 보면 국내 기업의 주주환원율이 낮은 게 맞다. 하지만 미국이 그러다 제조업 불모지가 된 것 아닌가. 기업 투자의 가장 중요한 원천은 유보된 이윤이다. 그걸 빼앗기면 기업은 죽는다. 최소한 기업이 투자할 여력은 남길 수 있도록 제동 장치를 만들어 놔야 한다. 일부에선 주주환원을 해도 언젠가는 그 돈이 다시 증시로 들어오지 않겠냐고 한다. 하지만 그건 기업이 어떻게 돌아가는 지 모르고 하는 얘기다. 돈만 아니라 축적된 노하우, 경영 문화, 협력업체 등 장기적인 네트워크가 있어야 한다. 그렇게 몇십년을 이해관계자들이 합심하고 노력해야 삼성전자, 현대자동차 같은 회사가 나온다. 이런 기업이 한번 망가지면 다시 돈 줄 테니 잘 해보라 한다고 해서 살아나지 않는다. 언제든 돈 넣으면 돈 나오는 현금지급기가 아니란 얘기다.”
주식시장은 도깨비 방망이 아냐
Q : 정부는 증시 호조에 상당히 고무돼 있다. 돈이 부동산에서 생산적인 부문으로 흐르고, 고령화 시대의 안전판 역할도 할 것이란 기대인데.
A : “도움이 될 수는 있다. 하지만 주식 시장이 모든 문제를 풀 수 있는 도깨비 방망이는 아니다. 주식 시장으로 돈이 옮겨간다고 부동산도, 복지도, 기업 지배구조 문제도 해결할 수 있다면 당초 정부 부처를 뭐하러 그렇게 많이 만들어 놓았겠나. 금융투자기구 하나만 있으면 되는 것 아닌가. 각각의 문제에 맞는 솔루션을 찾는 게 더 중요하다. 주택 문제는 살기 좋은 집을 많이 만들어 수요가 몰리거나 거품이 생기지 않는 구조를 만드는 게 기본이다. 노후 안정 문제는 복지 제도로 풀어야 한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의 평균 복지 지출이 국내총생산(GDP)의 22%인데 우리는 15%밖에 안 된다. 그러니 어떻게든 기회가 올 때 한몫 잡으려 하고, 투기성 투자에 매달리는 이들도 늘어나는 것 아닌가.”
Q : 주주권 강화 정책을 보완한다면 어떻게 해야 하나.
A : “미국처럼 극단적으로 가지 않도록 한도를 정해두는 게 맞다고 생각한다. 그것도 어렵다면 장기 투자자에 의결권이나 배당을 더 주는 식의 보완책이라도 있어야 한다. 특히 중국과 치열한 경쟁을 벌이고 있는 산업이 문제다. 이런 산업에서 당장 주주환원율을 높이지 않되 기업들이 더 투자하는 식의 대타협을 할 수도 있지 않겠나.”
◆장하준=서울대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영국 케임브리지대에서 경제학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1990년 한국인으로는 처음 케임브리지대 교수가 됐고, 2022년 런던대로 옮겨 재직 중이다. 신고전학파 경제학에 대안을 제시한 학자에게 주는 군나르 뮈르달상, 경제학의 지평을 넓힌 학자에게 주는 바실리 레온티예프상을 수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