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가락만 한 USB 하나가 세계 1위 반도체 부품 기업을 흔들었다. 피해 회사는 반도체 후공정의 핵심 부품인 ‘캐필러리’ 시장의 약 70%를 점유한 한국 업체다. 수백억 원의 개발비가 투입된 제품의 핵심 기술이 내부 직원을 통해 중국 경쟁 기업으로 빠져 나갔다.
이 사건은 한 회사 직원의 일탈이 아니라 한국 반도체 기술이 어떤 방식으로 빠져나갈 수 있는지 보여주는 경고다. 해당 직원은 지난해 긴급 체포 후 기소돼 현재 재판을 받고 있다.
‘이팩트: 이것이 팩트다’ 취재팀은 공개되지 않은 반도체 기술 유출 사건의 내막을 3회에 걸쳐 심층 보도한다.
「
1화. 사라진 USB
」
회사는 공장 전체에 CCTV를 설치해 출입 인원을 관리한다. 촬영이나 저장매체 반입,반출도 엄격히 제한된다. 사진 회사 제공
지난 4월 8일 오후 5시 20분, 서울중앙지방법원 318호 법정.
피고인 K는 반듯해 보였다. 연두색 수형복은 다린 듯 빳빳했다. 1981년생, 마흔다섯. 머리는 단정했고 정수리에는 새치가 많았다. 약간 튀어나온 광대뼈, 각진 턱선, 마른 체형. 지하철역 출구나 회사 복도에서 스쳐 지나갈 법한 흔한 40대 남성의 얼굴이었다.
그러나 입을 여는 순간, 평범함은 다른 얼굴로 바뀌었다.
재판장이 K를 증인석에 불러 세웠다.
" 피고인이 USB에 저장한 파일이 단 한 건도 없습니까? 여러 건이 있는데 피고인이 저장한 건 하나도 없단 말입니까?(판사) "
" 네, 없었습니다.(피고인 K) "
K의 표정은 방청석에서 잘 보이지 않았다. 대신 눈에 들어온 건 그의 귀였다. 답변이 길어질수록 K의 귀가 붉게 달아올랐다. 말은 뻔뻔했고, 그 뻔뻔함으로 자신을 납득시키려는 듯 했다.
피해 업체는 ‘캐필러리’ 생산 분야 세계 1위의 한국 기업이다. 캐필러리는 칩과 회로 접합에 쓰는 초정밀 도구다. 정부는 캐필러리 제조 공정을 국가 핵심 기술로 지정했다. 그런데 이 기술 자료가 또 중국 기업으로 빠져나갔다. 범인으로 지목된 건 피해 기업의 중국 현지 공장장 K(45)였다.
캐필러리는 칩을 기판에 연결하는 초정밀 접합 도구다. 사진 유튜브 캡처
(계속) 한국 반도체 부품 기업 중국 현지 공장장이 제조 기밀이 담긴 USB를 유출한 혐의로 구속 기소돼 재판중입니다.
중국이 가장 많았다. 해외 기술 유출 사건의 절반 이상이 중국행이다. 2022년 12건 중 6건(50%)이 중국으로 빠져나갔고, 2023년 22건 중 15건(68%), 2024년엔 27건 중 20건(74%)이 중국으로 유출됐다. 해마다 늘었다. 경찰청 공식 집계 자료다.
캐필러리 생산 기술 자료가 유출된 곳 역시 중국이다. 중국 S 업체는 2022년 11월 광둥성에서 처음 설립됐다. 자본금은 3400만 위안(약 78억원). 등록 직원 수는 12명이고 회사 공식 페이지는 없었다. 크지 않은 회사이고 세워진 것도 최근이다.
2023년 11월 중국 저장성 후저우시에 세워진 중국 S업체 공장.
그런데 설립 4개월 만인 2023년 3월, 한국 K 기업을 인수했다. K 기업은 우리나라 ‘캐필러리’ 생산 2위 업체였다.
(계속) 우리 반도체 기술이 넘어간 중국 기업을 추적했습니다. 이 업체는 누가 언제 어떤 이유로 세운 회사이고 중국 정부와의 관련성은 없을까요.
피해 업체 측이 1년 가까이 내부 조사를 거쳐 확인한 기술 유출 일당의 또다른 배임·횡령 정황도 공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