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원식 국회의장이 7일 국회에서 열린 5월 임시국회 제1차 본회의에서 대한민국헌법 개정안 표결에 참여하고 있다. 왼쪽으로 국민의힘 의원석이 비어 있다. 연합뉴스
1987년 이후 39년간 이어온 헌법 체제를 바꾸려는 또 한 번의 시도가 무산됐다.
우원식 국회의장과 더불어민주당·조국혁신당·진보당·개혁신당·기본소득당·사회민주당 등 여야 6당이 발의한 대한민국헌법 개정안(개헌안)이 7일 국회 본회의에 상정됐지만 의결정족수 미달로 투표 불성립됐다. 개헌안이 의결정족수를 채우지 못해 투표함 개봉조차 못한 건 이번이 세 번째다. 2018년 문재인 전 대통령이 발의한 정부 개헌안, 2020년 민주당이 시민사회단체와 함께 국민발안 형식으로 내놓은 개헌안과 같은 전철을 밟은 것이다.
우 의장은 7일 오후 4시 4분께 “명패 수를 확인한 바 총 178매로 의결정족수인 재적 의원 3분의 2에 미치지 못해 투표가 성립되지 않았다”고 밝혔다. 개헌안 발의에 참여한 여야 6당과 민주당에서 탈당한 김병기 의원을 제외한 무소속 의원 전원이 표결에 참여하며 생긴 결과였다. 106석의 국민의힘이 불참하면서 현재 재적 의원(286석)의 3분의 2인 의결정족수 191석을 채우지 못했다.
우 의장은 오후 3시 30분께 본회의장에 참석한 의원들의 표결이 끝난 뒤 “반대하면 들어와 반대표를 던지고, 찬성한다면 들어와 찬성하라”며 약 30분간 국민의힘 의원들을 기다렸다. 하지만 국민의힘 의원들은 개헌 표결이 끝나고 민생 법안 처리가 시작되고 나서야 본회의장에 자리를 잡았다. 현장에선 “계속 나가 있으라(신장식 조국혁신당 의원)”는 야유가 터져 나왔다.
국민의힘 곽규택 수석대변인이 7일 국회에서 열린 의원총회에서 장동혁 대표와 송언석 원내대표를 비롯한 의원들을 대표해 개헌과 관련한 성명서를 낭독하고 있다. 연합뉴스
우 의장은 투표 불성립 선언 뒤 “39년 만의 개헌인데 국민투표로 가기 전에 국회에서 투표 불성립이 나온 것에 국민 여러분께 대단히 송구하다”며 “윤석열과 같은 사람이 다시 나타나면 이번 투표 불참으로 개헌을 무산시킨 여러분은 불법 비상계엄에 동조·방조한 역사의 죄인이 될 것”이라고 비판했다.
우 의장은 8일 오후 2시에도 본회의를 열어 개헌안 표결을 다시 시도하겠다는 방침이다. 개표 이후 안건이 받아들여지지 않는 게 확정되는 부결(否決)과 달리 투표 불성립(不成立)은 개표 자체가 진행되지 않아 찬반 표결 결과가 공개되지 않는다. 재투표를 하면 일사부재의(一事不再議) 원칙에 어긋나는 부결과 달리 투표 불성립은 재투표도 가능하다.
하지만 국민의힘은 계속해 불참하겠다는 방침이다. 장동혁 대표는 개헌 표결 뒤 기자들을 만나 “민주당이 자행하는 헌법 파괴부터 멈춰야 한다”고 강조했고, 정희용 사무총장은 “8일 결과도 똑같을 것”이라고 했다. 박충권 원내수석대변인은 “논란의 법안을 밀어붙이는 방식대로 개헌도 밀어붙이겠다는 것”이라며 “충분한 논의도 없이 국민 다수가 모르는 사이에 어물쩍 넘어가겠다는 것”이라고 했다.
강기정 광주광역시장(왼쪽 두 번째)을 비롯한 5ㆍ18 민주화 운동 단체 관계자들이 7일 국회에서 열린 제435회 국회(임시회) 1차 본회의에 대한민국 헌법 개정안이 국민의힘의 불참으로 투표 불성립이 될 것으로 보이자 심각한 표정으로 의원들의 의사 진행 발언을 지켜보고 있다. 연합뉴스
우 의장은 2024년 6월 취임 직후부터 적극적으로 개헌을 추진해왔다. 야당의 협조를 구하려 권력구조 개편 등이 빠진 ‘개헌의 문을 여는 개헌’, ‘최소한의 개헌’을 내세웠다. 그래서 이번 개헌안엔 ▶헌법 제명 한글화 ▶부마 민주항쟁, 5·18 민주화운동 정신 헌법 전문 수록 ▶국가균형발전 의무 명시 ▶계엄 국회 승인 의무화 및 해제권 부여 등 정치적 논란이 크지 않은 사안만 담았다. 우 의장은 표결 전날 장동혁 대표를 직접 찾아가 개헌 표결 참여를 설득했고, 지난 3월엔 국민의힘 의원 전원에게 손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하지만 국민의힘은 설득되지 않았다. 그동안 개헌 자체엔 찬성해왔지만 이번 개헌엔 “삼권분립을 무력화하는 일방적 졸속 개헌”이라며 당론으로 반대 입장을 정한 것이다. 장동혁 대표는 7일 표결 전 청와대 사랑채 앞에서 열린 현장 최고위원회의에서 “이재명은 ‘연임 불가’를 선언하라는 요구를 끝내 거부했다. 이번 개헌으로 길을 닦고 장기 독재 개헌으로 끝까지 가보겠다는 것”이라는 주장까지 폈다.
국민의힘 의원 중 유일하게 반대 의사진행발언을 위해 개헌 표결 전 본회의장을 찾은 유상범 원내운영수석부대표는 “정부와 여당이 앞장서서 사법 체계를 무너뜨리고, 법치주의를 유린하고 있지는 않으냐”며 “공소취소 특별검사법을 강행하고, 사법 파괴 내란을 획책하고, 헌법 개정마저 일방적으로 추진하고 있다”고 했다. 반면 천준호 민주당 원내운영수석부대표는 의사진행발언에서 “12·3 불법 계엄 해제 표결을 방해했던 국민의힘이 불법 계엄을 차단하는 개헌 표결을 방해하고 있다”며 “절윤은커녕 국민의힘 전체가 윤석열 세력 그 자체라고 봐야 한다”고 했다.
7일 국회에서 열린 5월 임시국회 제1차 본회의에서 대한민국헌법 개정안 표결이 이뤄지는 가운데 표결에 참여하지 않은 국민의힘 의원들의 명패가 놓여 있다. 연합뉴스
여권 관계자는 “개헌 투표 전 민주당이 밀어붙인 공소취소 특검이 결정타였다”며 “국민의힘에게 개헌 반대 명분을 실어줬다”며 안타까워했다. 강유정 청와대 수석대변인은 “본회의가 한 번 더 소집되면 국민의힘 의원들이 헌법기관으로서 책임감을 갖고 투표에 반드시 참여해야 한다”고 했다.
이런 가운데 여야는 본회의에서 민생법안 115건을 합의 처리했다. 매각한 친일 재산에 대한 환수 근거를 마련한 친일재산귀속법, 국가와 지방자치단체의 안전권 보장 책무를 규정한 생명안전기본법 등이 제정됐다. 또 연차를 시간 단위로 사용할 수 있도록 한 근로기준법 개정안, 피고인이 정당한 사유 없이 불출석하면 선고를 가능하도록 한 소송촉진특례법 개정안 등도 통과됐다.
다만, 8일 예정된 본회의는 파행이 예상된다. 우 의장이 개헌안 재투표를 예고하자 송언석 국민의힘 원내대표는 “졸속 개헌 처리 시도와 함께 상정되는 모든 안건에 대해 무제한 토론(필리버스터)로 대응할 것”이라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