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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빈의 수장고 안팎 훑기] 세상을 담는 추상, 일그러진 형식 실험

중앙일보

2026.05.07 08:10 2026.05.07 1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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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비딕』 소재로 한 프랭크 스텔라의 ‘설교단’
이사빈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관

이사빈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관

국립현대미술관 전시장에는 소설 『모비딕』을 소재로 한 작품이 하나 걸려 있다. 알루미늄판을 구부려 복잡한 형태로 만든 후 페인트로 칠한 것이다. 벽에 걸려 있지만 조각에 가깝다. 높이가 3m에 육박하는 대작이다.

작가는 프랭크 스텔라. 20세기 미술사에 한 획을 그은 미니멀리즘의 거장으로, 모든 미술사 책에 등장하는 이름이다. 미국의 주요 미술관 중 스텔라의 작품이 없는 곳은 찾아보기 힘들다. 개인적으로는 20세기 화가 중 가장 똑똑한 인물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현대미술에서는 똑똑해서 성공한 것 같은 예술가들이 분명히 존재한다.

미니멀리즘과 결별한 전환기 작품
알루미늄판 구부려 소설 장면 표현

추상 흐름 바꾼 미니멀리즘 거장
미술교육 안 받고도 단숨에 성공

쉰 살 이전의 미술관 과감히 철회
말년까지 자기 예술 유연하게 성찰

의대생 아버지 도와 페인트칠
프랭크 스텔라는 1936년 매사추세츠에서 태어났다. 조부모가 시칠리아에서 미국으로 이주해 온 이민자 가정이었다. 스텔라의 아버지는 의사였는데, 젊어서는 의대 학비를 벌기 위해 부업으로 페인트칠을 했다. 이때 첫째 아들인 스텔라를 조수로 데리고 다녔다고 한다. 바닥과 벽에 페인트를 칠하면서 그는 일찍이 붓에 익숙해졌다.

스텔라는 고등학교 때 화가인 선생님에게서 처음 그림을 배웠다. 그리고 프린스턴 대학에 입학하여 역사학을 전공하고 미술수업을 들었다. 성실하고 뛰어난 학생이었던 그는 교수들을 따라 전시장을 다니며 자연스럽게 뉴욕 미술계에 입문했다.

스텔라는 한 번도 전문적으로 미술을 배운 적은 없지만 누구보다 빨리 성공하고 평생 잘나갔다. 한마디로 “미술계의 총아”였다. 대학을 졸업한 이듬해에 뉴욕 현대미술관(MoMA) 전시에 참여하고 30대 중반에는 이 미술관 역사상 최연소 작가로 개인전을 열었다. 그는 영리하고 도전적이었으며 시대의 흐름을 읽었다.

스텔라가 대학생이던 1950년대는 추상표현주의가 뉴욕 미술계를 휩쓸던 시기였다. 잭슨 폴록의 ‘액션 페인팅’은 물감을 대형 캔버스에 흩뿌려 작가의 감정과 에너지를 분출하듯 드러냈다. 마크 로스코의 거대한 색면화는 숭고함과 영적 감동을 불러일으켰다. 작가의 자아와 주관성이 예술의 핵심인 시대였다.

이성과 불결함의 결합 II, 1959. 스텔라가 23세에 뉴욕현대미술관(MoMA) 전시에 출품한 작품, MoMA 소장. [사진 MoMA]

이성과 불결함의 결합 II, 1959. 스텔라가 23세에 뉴욕현대미술관(MoMA) 전시에 출품한 작품, MoMA 소장. [사진 MoMA]

스텔라는 그 반대편에서 추상미술의 새로운 장을 연 인물이다. 그가 스물셋에 뉴욕 현대미술관 전시에 출품한 작품은 단번에 미술계의 주목을 받았다. 사각의 캔버스 전면을 검은색으로 칠하면서, 물감을 칠하지 않은 얇은 띠를 겹겹이 남겨 줄무늬처럼 보이게 만든 그림이었다. 의도는 하나였다. 입체감이나 깊이감이 느껴지는 요소를 완전히 제거하고 캔버스의 평면성을 드러내는 것. 회화를 순수한 물리적 사물로 되돌려 놓는 것.

인도의 황후, 1965, 뉴욕현대미술관 소장. 변형캔버스의 대표작이다. [사진 MoMA]

인도의 황후, 1965, 뉴욕현대미술관 소장. 변형캔버스의 대표작이다. [사진 MoMA]

스텔라는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캔버스의 모양까지 작품의 일부로 만들었다. 그의 초기 작품에 등장하는 줄무늬는 사실 캔버스의 형태 자체를 강조하기 위한 장치이다. 그는 일반적인 사각의 캔버스 대신 알파벳 ‘T’나 ‘V’ 등의 형태로 된 변형캔버스를 고안해냈다. 그리고 그 안에 캔버스의 형태에 상응하는 줄무늬 패턴을 그려 넣었다.

이런 작업방식의 근거는 캔버스 자체의 물리적 조건이 곧 그림의 내용을 결정한다는 것이었다. 이를 뒷받침하는 기발한 이론도 있었다. 바로 ‘연역적 구조’라는 개념으로, 캔버스라는 ‘전제’로부터 내부의 형태와 패턴을 도출해 낸다는 논리였다.

“보이는 것이 전부” 미니멀리즘 선언
전통적인 회화가 원근법을 이용하여 캔버스 안에 가상의 깊이감을 만들려 했다면, 스텔라는 규칙적인 패턴을 통해 눈속임을 제거하고 캔버스를 평평한 사물 그 자체로 되돌려 놓았다. 그는 자신의 그림에 담긴 의미를 해석하려는 평론가들의 모든 노력을 부인했다. “보이는 것이 전부(what you see is what you see)”라는 그의 유명한 선언은 미니멀리즘의 탄생을 알리는 신호탄이 되었다.

이렇듯 스텔라는 추상미술의 전개에서 가장 지적인 혁신을 이룬 작가였다. 20세기 초에 등장한 추상미술은 한눈에 이해가 어려워 어떤 식으로든 설명이 덧붙여지는 것이 관례였다. 화가의 심상을 표현하거나, 우주의 원리를 상징한다는 등. 그런데 미니멀리즘은 의미 따위는 없고 캔버스 자체, 그리고 그 위에 칠해진 물감이 전부라고 말하는 사조였다. 회화에서 색과 형태를 제외한 모든 것을 삭제해 버린 것이다.

스텔라의 등장으로 미국의 추상미술은 뜨겁고 감성 충만한 표현주의에서 차갑고 무심한 미니멀리즘으로 이행했다. 미니멀리즘의 극단적인 절제와 무미건조한 정서, 그리고 관람자의 기대를 충족시키기를 거부하는 태도는 당시로써는 완전히 새로운 것이었다.

1980년대 중반, 스텔라는 하버드 대학의 초청으로 1년간 석좌 교수직을 맡게 되었다. 그는 여섯 차례의 강연을 했는데, 인기도 대단했지만 상당한 파문도 일으켰다. 추상미술에 대한 과거의 입장을 공개적으로 철회한 내용이었기 때문이다.

이 강연에서 그는 추상 회화가 기하학과 평면성에 갇혀 생명력을 잃고 더 이상 대중과 소통할 수 없게 되었다고 선언했다. 그리고 카라바조나 루벤스 등 과거 거장들을 예시로 들면서, 동시대 회화가 어떻게 이들의 공간감을 계승하여 현대적 생명력을 얻을 수 있는지를 분석했다.

스텔라의 강연은 예술가가 자신의 창작 활동을 이론적·역사적 논리와 연결 지어 승화시킨 드문 사례로 꼽힌다. 그는 “추상은 어떻게 다시 살아남을 것인가”라는 화두를 던지며 화풍의 변화를 예고했다.

이 무렵에 시작한 것이 바로 ‘모비딕’ 연작이었다. 1985년부터 1997년까지, 총 12년에 걸쳐 조각과 판화를 포함하여 총 266개의 작품을 만들었다. 이 작품들은 바로크 시대 미술처럼 과장되고 복잡한 구성을 띤다. 속도와 방향, 생동감이 느껴지는 공간을 추구한 결과물이었다.

여기에는 사실 스텔라의 개인적인 취향도 반영돼 있다. 그는 50~60년대에 전성기를 보낸 많은 예술가들과는 달리 사회적 물의를 일으킬만한 나쁜 습관이 거의 없었다. 그런데 단 한 번, 법을 어겨 재판정에 선 적이 있다. 자신의 페라리를 몰고 시속 88㎞ 제한 구간에서 무려 169㎞의 속도로 주행하다가 적발된 것이다. (당시 판사는 이례적으로 징역형이나 벌금형 대신 그의 회화에 대한 대중 강연을 하라는 판결을 내렸다.) 그는 속도와 에너지에 대한 열정이 있었고 자동차 경주를 좋아했다. ‘모비딕’ 이전에는 자동차 경주 트랙을 모티브로 작품을 만들기도 했다.

한편 스텔라에게 ‘모비딕’은 추상으로도 이야기를 표현할 수 있는지를 탐구하기 위한 실험이기도 했다. 어느 날 그는 뉴욕의 수족관에서 고래가 움직이는 모양이 파도의 형태와 비슷하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그 순간 『모비딕』을 떠올렸다. 그는 소설을 읽기 시작했고, 이 이야기로 작품을 만들기로 결심했다.

설교단, 1989,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사진 국립현대미술관]

설교단, 1989,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사진 국립현대미술관]

1851년에 발표된 허만 멜빌의 소설 『모비딕』은 거대한 향유고래를 찾는 사흘간의 항해를 다룬 장대한 서사시이다. 항해와 고래사냥에 대한 이야기에 신의 존재에 대한 탐구와 성찰이 어우러져 있다. 소설은 총 135개의 장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스텔라는 각 장의 제목을 따서 작품을 만들었다.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설교단’은 이 중 제8장의 제목이다.

소설 속 화자 이스마엘은 고래잡이 어선에 타기 전에 예배당을 찾는다. 그런데 이 예배당의 설교단은 유난히 높고 줄사다리가 달려 있어 뱃머리를 연상시켰다. 이스마엘은 설교단을 묘사하다가 문득 깨닫는다. 이 세상이 배라면 설교단이야말로 뱃머리에 해당하는 부분이라고. 하나님의 노여움을 맨 먼저 견뎌내는 곳, 신에게 순풍을 보내 달라고 기원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내 작품은 2차원·3차원 사이 2.7차원”
『모비딕』의 주제 중 하나는 인간은 결국 아무것도 알 수 없다는 불가지론이다. 거대한 고래를 끊임없이 쫓는 인간의 시도는 끝내 좌절된다. 소설이 발표된 1851년에는 이 고래가 어떻게 생겼는지 실제로 본 사람도 거의 없었다고 한다. 화자인 이스마엘은 고래에 대한 방대한 지식을 나열하지만 막상 맞닥뜨리면 너무나 거대한 몸집의 일부분밖에 보지 못한다. 그가 탄 배는 끝내 침몰한다.

스텔라의 ‘모비딕’은 추상이라는 형식 안에 거대한 인간적 서사를 담으려는 시도라는 점에서 소설 속 항해와도 닮아 있다. 한편으로는 파도와 고래의 형태라는 추상에서 시작하여 인간과 세상의 이야기로 귀결되는 그의 예술적 항로 변경을 반영하는 작품이기도 하다. 명료하고 논리적인 평면은 회화도 조각도 아닌 어떤 모호하고 과장된 형태로 전환되었다. 당신의 작품이 2차원이냐 3차원이냐 묻는 질문에 스텔라는 고개를 갸우뚱한다. “글쎄요, 2.7 정도?”

복잡하고 기괴한 그의 후기 작품들은 논리와 외관이 말끔하게 떨어지는 초기 작품만큼 각광을 받지는 않았다. 그런데 총기와 패기 넘치는 20대의 스텔라만큼 시대의 흐름과 자신의 위치를 끊임없이 성찰하는 50대 이후의 스텔라도 매력적이다. 87세의 나이로 사망하기 전까지 그는 다양한 시도를 멈추지 않았다. 미니멀리즘은 딱 그 시기에 유효한 태도일 뿐이었음을 인정하기도 했다.

그런 의미에서 스텔라는 정말 똑똑했던 것 같다. 인생의 항로에서 자신의 위치를 파악하고, 부족한 부분을 인정하고, 시대와 나이에 맞게 스스로를 변화시키는 유연함은 흔치 않은 덕목이다. 똑똑하다는 말은 이런 사람에게만 쓰고 싶다.

이사빈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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