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후 세계를 이끌어온 자유무역, 다자주의 질서는 지구촌에 유례없는 성장과 번영을 가져왔다. 수억 명이 빈곤에서 벗어났으며 한국은 주요 수혜자였다. 그러나 지난 10여 년 이 질서는 크게 흔들리고 있다. 미·중 갈등, 미국의 관세와 대외정책 변화, 러-우 전쟁, 미·이란 전쟁 등은 세계가 점점 더 불안정하고 위험한 ‘힘의 질서’로 이동해가고 있음을 말해준다. 경제는 더 이상 경제만의 영역이 아니고 기술, 에너지, 공급망, 금융까지 모두 안보의 일부가 되었다. 지금 이 변화는 세계질서의 일시적 후퇴가 아닌 구조적 전환임이 분명하다. 이미 주요 선진국들의 정치토양이 바뀌어 버렸고, 세계화, 개방정책에 대한 지지는 전에 비해 빛이 바랬다. 국제질서는 ‘효율중심의 세계화’에서 ‘안보중심의 선택적 세계화’로 재편되고 있다. 국가와 기업의 생산, 투자는 이제 싼 곳으로만 가지 않고 안전한 곳, 신뢰할 수 있는 파트너와의 거래를 추구하고 있다.
세계는 불안정한 힘의 질서로 이동
단순 적응 넘어 적극 대응 나서야
경제력, 핵심산업 등 전략자산 갖춰
문제는 이를 구사할 내부역량 여부
그렇다고 세계화가 끝난 것은 아니다. 교역과 투자는 여전히 확대되고 있다. 다만 그 흐름이 바뀌고 있을 뿐이다. 2025년 세계교역량은 미국의 관세정책에도 불구하고 4.6%증가했다. 중국의 대미수출은 크게 줄었지만 유럽과 아시아지역으로의 수출은 크게 늘었다. 중국수출이 결국 이 지역국가들의 산업과 경제마저 위협하면서 보호무역주의는 강화되고, 글로벌공급망은 재편되고 있다. 다자주의 또한 아직 붕괴된 것은 아니다. 약화된 형태로 유지되고 있다. 유엔, 세계은행, 국제통화기금(IMF)과 같은 국제기구의 영향력은 줄었지만, 이를 대체할 수 있는 새로운 질서는 아직 등장하지 않았다. 이들 기관은 강대국 경쟁 속에서 최소 공통분모를 유지하려는 역할로 축소되어가고 있으나 여전히 위기대응과 정책조정의 역할에 있어 이들 외 달리 기댈 곳이 없다. 세계는 이러한 상태를 상당기간 지속해갈 것으로 보인다. 미·중 경쟁과 패권다툼은 단기간에 해소되지 않을 것이고, 각국의 산업정책과 경제안보전략은 이미 국내정치와 결합되어 되돌리기 쉽지 않다.
이 혼미한 전환기에 한국은 어디에 서있는가? 어떻게 이를 감당해 나가야 하는가? 한국은 세계 10위권의 경제규모를 가진 중견국이며, 첨단 핵심 제조분야에서 주요 생산국이다. 동시에 대외의존도가 매우 높은 경제이기도 하다. 한국은 이 구조적 변화의 큰 수혜자가 될 수도, 큰 피해자가 될 수도 있다. 따라서 한국은 이 시대변화에 단순 적응을 넘어 능동적 대응을 해 나가야 할 것으로 보인다.
첫째, 경제와 안보를 통합적으로 사고하고 접근하는 체제구축이 필요하다. 반도체와 배터리, 방산, 조선은 더 이상 단순한 산업이 아니라 국가안보와 대외정책의 핵심 자산이 되었다. 공급망의 재구성, 연구개발, 인력공급, 금융, 에너지 정책은 이제 각각이 아닌 통합적으로 접근되어야 한다. 이를 위한 컨트롤타워의 구성이 필요하다.
둘째, 시장과 공급망의 다변화, 시스템 교역의 중요성이다. 미, 중 어느 한쪽에 과도하게 의존하는 구조를 피하고 동남아, 인도, 중동, 유럽과의 경협을 확대하는 것은 필수다. 지금 세계는 단순한 상품보다 신뢰할 수 있는 시스템을 원하는 방향으로 나가고 있다. 방산과 원전, 전력망, 전자정부, 통신망, 인프라를 결합한 새로운 통상전략을 모색해야 한다. 미·중 갈등 틈에 끼여 고심하는 중견국과 개도국들에 한국이 이러한 패키지 교역으로 다가설 수 있는 점은 큰 전략적 이점이며 외교자산이다.
셋째, 경제보호막을 강화해야 한다. 에너지, 식량, 해운, 데이터 인프라는 위기상황에서 국가생존을 좌우한다. 비축과 안정적 확보능력을 늘려 나가도록 하자. 우리는 에너지 해외의존도와 해상교통로 의존도가 매우 높다. 원전, 재생에너지의 균형적 확대도 필요하다.
향후 세계는 강대국 간 갈등으로 생긴 국제질서 틈새를 중견국 연대와 소다자 협력으로 메워 나가려 할 것 같다. 한국은 중견국으로서 디지털 통상, 공급망, 개발협력 등 다양한 분야에서 이러한 연대를 주도할 수 있는 위치에 있다. 또한 IMF 쿼터 조정, WTO의 분쟁해결기능 등 손상되었지만 유지되어야 할 국제기구의 역할 보호에 힘을 실어주어야 한다. 한국이야 말로 이런 다자간 자유교역 질서의 최대수혜국이었고, 앞으로도 그럴 수밖에 없는 처지에 놓여있다.
세계질서는 지금 전환의 한가운데에 있다. 과거로 돌아가기는 어렵고, 새로운 질서는 형성되지 않았다. 한국이 이 변화를 위기가 아닌 기회로 만들 수 있는 길은 개방을 유지하되 전략적이고, 동맹을 중시하되 자율성을 확보해 나가며, 중견국가로서 적극적 역할을 해 나가는 것이다. 다행히 한국은 지난 70년 키워온 경제력과 다른 나라들에 흔치 않은 전략적 자산들을 갖추고 있다. 문제는 이를 장기적 시각에서 전략적으로 구사해 나갈 수 있는 체제정비와 내부역량을 강화해 나가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