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에 투영된 살의는 몹시 뒤틀려 있긴 해도, 나름의 논리가 있다. 절대 동의할 순 없지만, 이해할 수는 있다는 뜻이다.
그런데 ‘이 사건’은 달랐다. 솔직히 지금도 확신이 서지 않는다. 현재 교도소에 수감된 살인범 역시 계속 무죄를 주장하고 있다.
범죄 전문 피디나 작가는 현장에서 살의(why)를 읽으려고 애를 쓴다. 경찰이 누구(who)에 더 집중하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자, 이제부터 제시되는 현장에서 여러분도 살의를 찾아보시길 바란다.
그 안에 인간의 원초적인 욕망이 숨겨져 있으니.
AI 활용 이미지. 이지상 기자
#1. 소주병 하나, 지문 하나 그날 자정, 회사에서 인사 발표가 있었다. 승진자 명단에 자신의 이름이 없다는 것을 확인한 남자는 술집으로 향했다. 부어라 마셔라, 만취 상태로 귀가한 시간이 새벽 4시20분. 아내와 딸이 잠에서 깰까, 안방을 피해 작은 방문을 살며시 연다. 그리고 남자는 그 자리에서 굳어버렸다.
아내가 쓰러져 있다. 아무리 흔들어도 반응이 없다. 남자는 떨리는 손으로 휴대전화 버튼을 누른다. 119? 아니다. 112? 역시 아니다.
조금 전까지 함께 술을 마시다 헤어졌던 여자였다. 내연녀였다.
“지금 빨리 와줘.”
그녀가 집으로 달려왔고, 두 사람은 아내를 병원으로 옮겼다. 하지만 이미 숨이 멎어 있었다.
부검 결과, 사망 원인은 독극물 중독. 아내의 몸에서
치사량의 수십 배에 달하는 청산 이온이 검출됐다.
가능성은 두 가지, 자살 혹은 독살이다.
단서는 하나였다. 방에 남겨진 소주병. 그리고 그 병에 찍힌 오른손 엄지 지문 하나.
이상한 건, 엄지 지문의 방향이었다. 지문이 병의 위에서 아래를 향해 있다. 즉, 선 자세에서 병을 집어 들었다는 뜻이다.
지문의 주인은 남편이었다.
경찰이 추궁하자, 남편이 진술했다.
“방문을 열었을 때 아내는 이미 쓰러져 있었어요. 옆에 소주병이 있길래 이걸 마셨나 싶어 들어봤을 뿐입니다.”
자세를 재현해 보니 지문 방향과 일치한다.
그런데 이상하지 않은가?
아내가 스스로 마셨든, 누군가 따라줬든, 그 사람의 지문이 함께 있어야 정상이다. 그런데 병에 남은 지문은 남편 것 하나뿐이다. 누군가 의도적으로 닦아낸 것이다.
#2. 극본: 내연녀, 연출: 내연녀 경찰은 내연녀를 긴급 체포했다. 참고인이 아니라 피의자다.
아파트 CCTV를 확인하니, 아내가 숨지기 전 마지막으로 함께 있었던 사람이 내연녀였다. 그녀는 혐의를 전면 부인했다.
“소주 서너 잔 같이 마신 게 다예요. 제가 나올 때 그 여자는 분명 살아 있었다고요.”
그러곤 묘한 말을 덧붙였다.
“전화 받고 집에 갔을 때 쓰러진 여자 옆에 흰 가루 봉투가 있었어요. 남편한테 물었더니 ‘내가 사둔 청산가리인데 애엄마가 먹은 것 같아. 좀 치워줄래?’라길래 들고나와 버렸어요.”
의심의 방향을 슬쩍 남편에게 돌린 발언이다.
불륜이든 공범이든, 비밀을 공유하는 관계에서 신뢰는 생각보다 쉽게 무너진다.
침묵을 지키면 둘 다 살 수 있는데도, 상대를 믿지 못해 먼저 입을 여는 것. 우리가 숱하게 봐온 ‘죄수의 딜레마’다.
형사들은 그 심리를 파고들었다. 내연녀의 진술, 즉
‘그녀가 당신을 의심하고 있다’는 말을 남편에게 전해 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