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25일 한낮의 열기가 터질 듯한 서울 문화비축기지의 ‘히어로 록 페스티벌’. 록 밴드 ‘카디(KARDI)’ 차례를 앞두고 무대 위로 거문고가 올라왔다. ‘카디’는 2021년 JTBC 오디션 프로그램 ‘슈퍼밴드2’를 통해 결성된 4인조 팀으로 거문고 연주자 박다울이 속해있다. 박다울은 이날 기타리스트처럼 선 채로 거치대에 놓인 거문고를 연주했다. 오른손에 쥔 술대(대나무 막대)로 여러 현을 빠르게 번갈아 휘갈기고, 팔을 돌리며 방방 뛰다가 거문고를 강하게 내리쳤다. 퍼포먼스 중에 거문고 줄 하나가 끊어지기까지 했지만 곧장 예비 거문고를 꺼내 아무렇지 않게 자신의 파트를 이어갔다. 관객 호응도 함께 폭발했다.
그간 ‘박제된 음악’으로 치부되던 국악이 아티스트들의 과감한 실험·도전에 힘입어 록 페스티벌, 인디신에서 존재감을 키워가고 있다. 전통음악에 기반을 두되 악기나 장르의 과감한 조합, 현대적 감각을 덧입힌 가사 등으로 젊은 세대를 사로잡으면서다. 일각에선 ‘트레디셔널 컨템포러리 장르’가 탄생했다고도 말한다.
추다혜차지스. [사진 소수민족컴퍼니]
오는 31일 ‘아시안팝페스티벌’에 오르는 ‘추다혜차지스’는 최신 국악의 변주 양상을 말할 때 빠질 수 없는 팀이다. 소리꾼 추다혜와 기타리스트 등 4인으로 결성된 이들은 자신들의 음악 장르를 ‘사이키델릭 샤머닉펑크’라고 부른다. 추다혜가 부르는 노래는 분명 무가(巫歌)인데 여기에 록·펑크·레게·덥 등이 결합돼 생소한 사운드를 만들어낸다. 2집 ‘소수민족’에서 완성도를 높인 이들은 지난 3월 한국대중음악상에서 ‘올해의 음반상’을 거머쥐었다. 올 10월부터는 유럽 4개국 투어 콘서트도 진행한다.
시오트.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지난 3월 말 정규앨범을 내고 인디신에서 활발하게 활동하는 ‘시오트’는 가야금·기타·키보드로 이뤄진 3인조 밴드다. JYP엔터테인먼트 프로듀서 출신의 리더 ‘지쿠’ 영향으로 재즈와 대중음악, 힙합까지 다채롭게 소화한다. 지쿠는 “국악기 또한 레게나 라틴 음악에 사용되는 여느 악기처럼 자연스럽게 다른 장르에 녹아들고 있다”고 말했다.
국악 전체 음역대를 아우르기보다 특정 악기나 보컬을 강조하는 경향도 두드러진다. 지난달 21일 신스팝 기반의 신곡 ‘떴다 저 까마귀’를 발표한 ‘이날치’가 대표적이다. ‘이날치’는 베이스 기타와 소리꾼으로만 이뤄진, ‘국악기 없는 국악 밴드’다.
동양고주파. [사진 동양고주파]
오는 7월 여우락 페스티벌에 출연하는 ‘동양고주파’의 경우 ‘양금’과 베이스기타, 퍼커션으로 이뤄진 팀이다. 보컬은 없다. 양금 연주자 윤은화는 “중간 음역대를 맡고 있는 양금이 사실상 솔로도 맡고 있다”면서 “멤버, 악기 충원보다는 이펙터 등 다양한 장비를 통해 기존 악기 음색을 변주, 좀 더 특별한 음악을 만들려고 한다”고 말했다.
상자루. [사진 상자루]
내세우는 메시지도 ‘수궁가’ 등 유명 판소리 원전을 개사하던 수준에서 확 달라졌다. 지난 1~2월 미국 투어 7회 공연을 마친 3인조 팀 ‘상자루’는 “이 넓은 사대문 안팎으로/작은 몸 하나 뉘일 곳이 없단다/월세건 LH건 뭣이 됐건 집을 구해 보자”(청년은 강제로 집시), “태평하고 싶어/아무것도 하기 싫어”(태평가) 등 현 세대의 자화상을 노래한다. 지난해 펜타포트 록 페스티벌에 이어 3월 ‘더 글로우’, 지난달 ‘러브썸 페스티벌’ 무대에 선 송소희의 자작곡 ‘낫 어 드림’은 “마음을 놓아/이곳에서 날 불러/눈물은 닦고/달려온 나의 저 길을 바라봐” 등 위안을 전한다.
송소희. [사진 어센틱]
이처럼 ‘힙’해진 국악의 모습은 국악인들의 생존 노력과 ‘K 브랜드’ 위상 변화가 맞물린 결과라는 분석이 나온다. 추다혜, 박다울, 송소희 등은 어릴 때부터 국악인의 길을 걸으면서도 동시대의 음악을 흡수하면서 자라나 작곡 단계부터 국악적 문법을 적용하는 화학적 결합을 주도하고 있다. 국악고·서울대 출신의 가야금 연주자 이유림(시오트)은 “대학 때 영국에 교환 학생을 갔다가 유럽의 테크노 음악을 접하며 새로운 장르에 대한 꿈을 키웠다”면서 “우리 스승 세대만 해도 전공자들이 전통음악 이외의 것을 손대는 것에 대한 거부감이 컸지만, 지금은 분위기가 많이 바뀌었다”고 말했다. 한 국악계 관계자는 “최근 해외에서 한국 문화에 대한 관심이 커진 영향으로 국내에도 젊은 국악 팬이 생기고, 이것이 다시 새로운 음악적 시도들로 이어지는 선순환이 되고 있다”고 말했다.
서정민갑 평론가는 “최근 10여년 간 국악을 뿌리에 두고 여러 시도를 하는 아티스트들의 저변이 넓어지고 있다”며 “이들의 공통점은 ‘국악 밴드’로 명명되길 거부한다는 점이다. ‘트레디셔널 컨템포러리 음악’ 등 새로운 명칭이 필요한 시점”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