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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23㎏ 빠진 채 기내식 연명…인천공항에 갇힌 난민들

중앙일보

2026.05.10 13:00 2026.05.10 17: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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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항에서 유일하게 바깥 공기를 마실 수 있는 곳이라 자주 와요. "
지난 7일 오후 1시30분쯤 인천국제공항 제2터미널 출국장에서 만난 중앙아프리카 출신 은보코(가명)는 익숙하다는 듯 283번 탑승게이트쪽으로 기자를 안내했다. “가장 좋아하는 장소”라며 소개한 곳은 게이트 인근에 마련된 실외 정원 앞이었다. 밀폐된 공항에서 유일하게 바깥 공기를 쐴 수 있는 공간이라 주로 이곳을 배회하며 시간을 보낸다고 했다. 은보코는 “본국에서 정치적 박해를 받았다”며 아내와 함께 지난 1월 한국에 왔다. 한국대사관으로부터 관광비자를 받아 입국한 뒤 망명을 신청할 계획이었다. 그런데 입국 심사 단계에서 거절당하며 공항 환승(면세) 구역 출국대기실에 머물고 있다.
인천국제공항 제2터미널 환승구역에 마련된 실외 정원으로 취재진을 안내하는 은보코(가명). 곽주영 기자

인천국제공항 제2터미널 환승구역에 마련된 실외 정원으로 취재진을 안내하는 은보코(가명). 곽주영 기자


은보코는 영화 ‘터미널’의 주인공처럼 고국으로 갈 수도, 한국에 입국할 수도 없는 처지여서 공항에 살림을 꾸렸다. 들고 온 위탁수하물은 항공사에서 보관하고 있어 그의 짐은 작은 가방과 안에 든 서류가 전부다.

일상은 영화처럼 역동적이지 않다. 출국대기실에서 지내며 하루 세끼 기내식을 먹는다. 인도적 차원에서 제공되는 식사다. 가톨릭 신자인 은보코는 기상 후 아침을 먹고 기도실에 한동안 머문다. 점심 식사 후에는 실외 정원과 면세점 등 공항터미널을 배회한다. 오후 5시에 제공되는 저녁 식사를 마치면 출국대기실 TV로 국제뉴스를 보다 잠든다. 이런 생활을 현재 4개월째 계속하고 있다. 은보코는 “나와 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들은 슬퍼하고 울기도 한다”고 말끝을 흐렸다.
공항 난민들이 지내고 있는 인천국제공항 제2터미널 출국대기실. 곽주영 기자

공항 난민들이 지내고 있는 인천국제공항 제2터미널 출국대기실. 곽주영 기자


중앙일보는 이날 인천공항출입국·외국인청의 협조를 받아 공항 장기대기자들과 이들이 머무는 출국대기실의 모습을 취재했다. 이들의 생활 모습과 출국대기실이 언론에 공개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출국대기실은 입국이 허가되지 않은 외국인들이 출국 전까지 임시로 대기하는 곳이다. 남·여 생활공간이 분리돼 있고, 안에는 화장실과 샤워실, 긴 침상이 있다. 침상 위에 깔린 얇은 매트리스 한 장만큼이 이들이 가진 유일한 사적 공간이다. 길어야 하루 이틀쯤 머무는 곳이라 장기 체류에는 부적합해 보였다. 그러나 장기대기자들은 딱딱한 침상 위에서 쪽잠을 자며 짧게는 수개월 길게는 1년 가까이 지내고 있다.

장기대기자들은 ‘공항 난민’이라고도 불린다. 난민법상 난민 인정을 받으려면 ‘난민 심사 절차’에 회부돼 심사를 받아야 한다. ‘난민 신청자’ 지위를 얻게 되면 입국해 인도적 지원을 받을 수 있지만, 불회부되면 입국이 불허된다. 오로지 경제적인 이유로 난민 신청을 하는 등 사유가 명백하지 않다고 판단될 경우 난민 심사 절차에 불회부될 수 있는데, 이런 외국인 중 일부가 공항 난민이 된다. 난민 심사를 받아야 입국이나 송환을 결정할 수 있지만, 심사조차 받지 못하거나 법원 판단이 수개월 이상 걸리는 등 늦어지면서 출국대기실 장기 체류 사례가 되풀이되고 있다.



인천공항에 10명 장기 체류…미성년 아이도

인천국제공항 1·2터미널 출국대기실에는 현재 이런 공항 난민 10명이 거주하고 있다. 미성년자인 아이과 함께 한국행을 택한 남성도 있었다. 서아프리카 출신 디알로(가명)는 아이과 함께 인천공항에서 지낸 지 벌써 11개월 째다. 아이는 학교에서 교육을 받고, 친구들과 어울려야 할 시기에 공항 난민이 됐다. 인천공항출입국·외국인청에서 아이에게 책이나 옷가지 등을 지원하고 있지만, 긴 공항 생활을 버티기에는 부족할 수밖에 없다.
공항 난민들에게 지급되는 기내식. 사진 카빈다(가명)

공항 난민들에게 지급되는 기내식. 사진 카빈다(가명)


이런 생활이 지속되다 보니 몸 상태가 악화된 공항 난민도 있다. 1터미널 출국대기실에서 지내는 중앙아프리카 출신 여성 일룽가(가명)는 지난해 6월 인천공항에 왔을 때보다 체중이 23㎏이나 빠졌다. 낯선 환경에서 음식을 제대로 먹지 못했고, 위염까지 겹쳤다고 한다. 일룽가는 “몸이 계속 좋지 않아 (출입국·외국인청) 직원들과 함께 외부 병원도 갔다 왔다. 긴 공항 생활에 많이 지쳤고, 몸 상태도 나아지지 않고 있다”고 했다.

추위를 이기지 못해 털장갑을 착용한 공항 난민. 곽주영 기자

추위를 이기지 못해 털장갑을 착용한 공항 난민. 곽주영 기자



유엔 “공항 난민, 한국 정부가 피해 배상해야”

유엔 자유권위원회는 지난 3월 공항 환승구역에서 약 420일간 지낸 공항 난민 A씨가 제기한 개인 진정 사건에 대해 한국 정부의 조처가 ‘시민적 및 정치적 권리에 관한 국제규약’ 위반에 해당한다고 결정했다. A씨는 지난 2020년 2월 인천공항에서 정치적 박해를 이유로 난민을 신청했지만 입국이 불허됐고, 이듬해 4월에야 법원의 수용 임시해제 결정에 따라 공항 밖으로 나왔다. 유엔은 장기 구금 등의 조처가 국제규약 위반에 해당함으로, 정부가 피해를 배상해야 한다고 권고했다.

공항 난민들이 밖으로 나가기 위해서는 법원에 불회부 결정 취소 소송을 제기해 승소해야 한다. 본국이나 자신들을 받아줄 제3국으로 가는 방법도 있지만, 대부분 한국 입국을 희망하고 있다. 중앙아프리카 출신 남성 무간자(가명)는 한국을 ‘good country’(좋은 나라)라고 말하며 엄지를 치켜들었다. 그러면서 “인도적 지원을 해주고 계신 관계자들께 감사하다. 본국의 혼란을 피해 민주주의 국가인 한국에 왔다. (난민 심사) 기회를 주셨으면 한다”고 말했다.




변민철.곽주영([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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