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범 청와대 정책실장이 이달 초 SNS에 ‘금융의 구조 시리즈’ 4편을 올렸다. 과거만 보는 지금의 신용평가시스템은 문제가 있고, 잘못 설계된 구조 탓에 은행이 중·저신용자를 배제하고 있으며, 서민 금융기관이 비과세 혜택은 누리면서도 서민을 돕는 본연의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재명 대통령의 “왜 가장 절박한 사람이 가장 비싼 이자를 내야 합니까”라는 질문에 처음엔 헛웃음이 났고, 신용의 기본을 모르는 질문이라고 생각했단다. 하지만 “금융은 도대체 누구를 지키고 있는가”라는 고민으로 이어졌고, “한국 금융은 왜 이렇게 잔인합니까”라는 대통령의 말이 송곳처럼 가슴에 박혀 더는 웃을 수 없었다고 토로했다. 은행은 “준공공기관”이라는 표현도 썼다. 국가의 면허 위에서 예금자 보호라는 공적 안전망을 등에 업고, 위기 때면 구제금융의 보호를 받기에 완전한 민간 기업은 아니라는 거다. 이 대통령은 며칠 뒤 국무회의에서 “뜻대로 하세요”라며 김 실장에게 힘을 실어줬다.
김용범 대통령비서실 정책실장이 지난 3월 25일 서울 종로구 센트로폴리스에서 열린 K-경제안보 전략과 핵심과제 공개포럼에서 축사를 하고 있다. 연합뉴스
보수정부도 은행의 공공성 강조
은행 압박만 말고 시스템 개선을
결국 이재명식 기본시리즈 되나
세월 참 많이 변했다. 외환위기 이후 은행도 망하는 시대가 도래하자 은행의 수익성이 중요해졌다. 정부도 2001년 공식 자료에서 ‘금융기관’ 대신 ‘금융회사’라는 단어를 쓰기 시작했다. 은행도 상업성을 추구하는 엄연한 회사라는 뜻이 담겼다. 하지만 그 후 은행 수익이 많이 날 때마다 논란에 휩싸였다. 외환위기 이후 구조조정으로 은행 수는 줄었고, 엄격한 ‘면허 비즈니스’라는 진입 규제 덕분에 국가로부터 ‘과점 영업’을 보장받았다. 이런 점에서 은행이 ‘준공공기관’이라는 표현은 어느 정도 ‘불편한 진실’을 담고 있다. 은행의 부동산 담보 위주 대출 관행은 ‘전당포 영업’으로 비판받지만 바꾸기가 쉽지 않다. 그 자체가 규제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건전성 규제를 잘못해서 은행이 거덜나면 결국 국민 세금이 투입된다. 미국처럼 주택담보대출을 은행이 아니라 패니메이 같은 기관에서 전담하게 하는 방안을 고민해야 한다. 은행을 압박하기만 해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은행의 공공성 강조는 보수정부도 예외는 아니었다. 전임 윤석열 대통령은 2023년 “은행은 공공재”라며 상생금융을 압박했다. 은행을 준공공기관으로 보는 이재명 정부의 시각은 뿌리가 더 깊다. 대통령이 성남시장 시절부터 키워온 기본사회의 꿈과 연결돼 있다. 2023년 4월 당시 민주당 대표였던 이 대통령은 당 기본사회위원회 주최 기본금융 토론회에 참석해 이렇게 말했다. “이젠 국민 최저한의 삶을 보장하는 복지가 아니라 삶의 모든 영역에서 기본적인 삶을 보장하는 기본사회로 가야 한다.” 그런 기본사회의 한 축을 기본금융으로 봤다.
시민들이 서울시내의 한 은행 현금인출기를 이용하고 있다. 연합뉴스
김 실장은 단순히 금리를 낮춰주자는 동정론도, 위험을 무시하자는 무책임한 이야기도, 은행의 팔을 비틀겠다는 것도 아니라고 했다. 하지만 3년 전의 이 대통령 생각은 좀 다른 것 같다. 능력에 따른 금리 차이는 시장경제 측면에서는 당연하지만 “그건 시장의 입장”이며 “금융은 시장에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국민 주권에서 오는 국가 정책의 소산”이라고 했다. 저신용자의 금융접근권을 기본금융 차원에서 어느 정도까지 허용할지 사회가 합의 가능한 수준을 정할 수 있다고 했다.
지난달 하순 민주당은 민병덕 의원 등과 서민금융진흥원이 주최하는 금융기본권 실현을 위한 정책토론회를 열었다. 금융위는 이달 중 ‘포용금융추진단’(가칭)을 출범해 김 실장이 제기한 신용평가시스템 개선과 중·저신용자의 금융 소외 해결에 나선다. 농어촌 기본소득 시범사업을 비롯한 이재명식 기본사회가 기본금융으로 진화하고 있다. 김 실장은 ‘금융의 구조 시리즈’ 직전엔 적극재정을 옹호하며 재정 보수주의를 비판했고, 직후엔 반도체 특수로 인한 역대급 초과세수를 거론했다. 설마 재원 문제로 접었던 기본소득이 다시 논의되는 일은 없을 것으로 믿는다. 일시적 초과세수는 우리 경제의 구조개혁과 성장 동력 발굴에, 그리고 빚 갚는 데 써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