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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흙탕 뒹굴겠다는 도련님

중앙일보

2026.05.12 0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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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 조용한 성격의 전북 미드필더 김진규. 경기장에 서는 순간 거친 사투리로 동료를 지휘하는 야전사령관으로 돌변한다. 장정필 객원기자

평소 조용한 성격의 전북 미드필더 김진규. 경기장에 서는 순간 거친 사투리로 동료를 지휘하는 야전사령관으로 돌변한다. 장정필 객원기자


축구대표팀 미드필더 김진규(29·전북 현대)는 한국에서 공을 가장 예쁘게 차는 선수 중 한 명이다. 어릴 적 태권도를 해서 발재간이 좋은 그가 한 발로 공을 세운 뒤 몸을 360도 돌려 상대를 따돌리는 ‘마르세유 턴’을 선보이면 탄성이 절로 나온다. 지난해 9월 미국과 평가전에서 보여준 절묘한 원터치 침투 패스는 손흥민(LAFC)마저 엄지를 치켜세우게 만들었다.

그런데 오는 16일 북중미 월드컵 최종 명단 발표를 앞둔 김진규가 그 우아함을 잠시 옷장에 걸어두기로 했다. 그리고 그는 진흙탕 들어갈 각오를 하고 있다.

요즘 한국 대표팀을 향한 가장 뼈아픈 지적은 ‘도련님 축구’다. 90분간 경고 한 장 받지 않는, 착하고 예의 바른 축구로는 거친 세계 무대에서 살아남을 수 없다는 비판이다. 지난 8일 전북 완주의 전북 현대 클럽하우스에서 만난 김진규는 이 불편한 현실을 정확히 직시하고 있었다.

“냉정하게보면 월드컵 무대에서 우리보다 약한 상대는 없습니다. (손)흥민이 형은 ‘모든 선수가 상대가 짜증 날 정도로 밀어붙여야 한다’고 했고, (김)민재(바이에른 뮌헨)는 ‘최대한 더럽고 지저분하게 싸워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저부터 진흙탕 싸움을 할 각오입니다.”
지난달 오스트리아와 원정 평가전에서 김진규(가운데)가 상대 문전에서 골 실패를 아쉬워하고 있다. 연합뉴스

지난달 오스트리아와 원정 평가전에서 김진규(가운데)가 상대 문전에서 골 실패를 아쉬워하고 있다. 연합뉴스


지난달 오스트리아와 평가전(0-1 패)에서 60분만 뛰고도 고강도 수치 700을 찍었다. 이 수치는 시속 19.8㎞ 이상의 속도로 이동한 거리, 즉 전속력으로 달린 거리를 뜻한다. 김진규가 빠르고 격렬하게 700m를 뛰었다는 거다. 풀타임을 뛸 때를 기준으로도 리그 평균을 훌쩍 넘는 수치다. 심지어 지금 오른 발목이 아픈데 진통제를 삼켜가며 전장을 지키고 있다.

평소 아내에게 “목소리가 너무 작다”고 핀잔을 들을 만큼 조용한 성격이지만, 경기장에 서는 순간 거친 포항 사투리로 동료들을 지휘하는 야전사령관으로 돌변한다. 조용한 사나이가 그라운드에서만큼은 제일 시끄럽다.

타이밍도 절묘하다. 현재 대표팀 중원에는 비상이 걸렸다. 박용우(알아인)와 원두재(코르파간)가 부상으로 낙마했고, 황인범(페예노르트)마저 지난 3월 발목을 다쳐 시즌 아웃됐다. 황인범의 회복이 더딜 경우 최근 A매치 4경기 중 3경기에 선발 출전한 김진규가 허리를 책임지는 막중한 임무를 맡게 된다.

‘황인범 대체자’라는 시선이 부담스러울 법도 하지만 덤덤했다. “부담감보다는 다시 오지 않을 순간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돋보이지 않더라도 중원에서 공을 많이 받아주고, 매 순간 좋은 선택으로 매끄럽게 전진할 수 있도록 돕겠습니다.” 준비도 치밀하다. 드리블·활동량·패스·경기 조율 모든 것을 갖춘 스페인 미드필더 페드리(바르셀로나)의 영상을 반복해서 본다.

패스를 찔러주는 김진규(가운데). 연합뉴스

패스를 찔러주는 김진규(가운데). 연합뉴스


손흥민 소속팀 LAFC가 고전한 멕시코 원정 경기도 TV로 유심히 들여다봤다. 해발 2670m 고지대에서 톨루카(멕시코) 선수들은 공기밀도가 낮아 공이 다르게 날아가는 걸 적극 활용해 슈팅 31개에 4골, 중거리포만 18방을 때렸다. 과거 고지대 중국 쿤밍에서 전지훈련을 했던 김진규는 이미 그 느낌을 안다. 동명이인 김진규(41) 대표팀 코치가 “중거리슛을 부드럽게 때리라”고 조언도 해줬다.

굵직한 경험도 있다. 지난해 ‘팀 K리그’ 소속으로 뉴캐슬 유나이티드(잉글랜드)와 친선 경기에서 결승골을 꽂았다. “전술적으로 세밀하게 준비하면 세계적인 상대도 무너뜨릴 수 있구나 느꼈습니다.” 2022 카타르 월드컵 최종 명단 탈락의 아픔을 겪은 그는 지난해 6월 이라크전에서 1238일 만에 A매치 골을 넣었다. 11회 연속 본선 확정의 축포였고, 김진규가 왜 필요한지를 알린 신호탄이었다. 전북의 K리그1 우승도 함께 이끌었다.

김진규가 전매특허인 손가락으로 영문 ‘L(아내 이니셜)’을 만드는 세리머니를 하고 있다. 장정필 객원기자

김진규가 전매특허인 손가락으로 영문 ‘L(아내 이니셜)’을 만드는 세리머니를 하고 있다. 장정필 객원기자


한국에서 가장 우아하게 공을 차던 사내가 이제 월드컵 무대에서 가장 거칠게 구를 준비를 마쳤다. 골을 터트린 후 손가락으로 영문 ‘L(아내 이니셜)’을 만드는 세리머니를 상상하면서다. 더티 진규의 진흙탕 쇼는 지금 한국 축구 팬들이 가장 보고 싶어 하는 장면이기도 하다.





박린([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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