빔 벤더스 감독(오른쪽)이 다큐멘터리로 조명한 미술가 안젤름 키퍼와 키퍼의 창작 공간에 함께 섰다. [사진 에무필름즈]
1969년 독일의 한 미술대 학생이 아버지의 군복을 입고 유럽 각국의 상징적 유적들을 방문해 나치식 경례를 했다. 이런 자화상 사진을 엮어 발표까지 했다. 독일 신표현주의 미술가 안젤름 키퍼(81)의 ‘점령(Occupations)’ 연작이다. 당시 ‘네오 나치’의 맹랑한 도발로 치부되며 공분을 샀지만, 이후 전후 독일 사회의 망각과 위선에 맞선 예술작품으로 재평가됐다.
“1968~69년 즈음은 2차 세계대전, 파시즘 같은 화제가 전혀 언급되지 않았어요. 학교에선 3주 동안 수업하고 끝이었죠. (중략) 저는 모두의 얼굴 앞에 거울을 들었던 겁니다.”
훗날 키퍼가 밝힌 소회다.
이런 장면을 담은 다큐멘터리 ‘안젤름’(2023)이 13일 개봉한다. 동갑내기 독일 영화 거장 빔 벤더스(81) 감독이 키퍼의 작가 세계를 다뤘다.
역사의 진실을 잊지 않는 것. 1991년 한 식당에서 서로를 우연히 만났다는 키퍼와 벤더스 감독, 두 예술가를 평생지기 친구로 만든 화두였다.
다큐 ‘안젤름’은 키퍼가 1992년부터 프랑스 남부 바르작에 조성한 예술 단지를 주 무대로, 전시된 작품들을 관통하는 기억과 기록이란 주제를 탐구했다. [사진 에무필름즈]
벤더스 감독은 극영화 ‘파리, 텍사스’로 1984년 칸영화제 황금종려상을 받은 이후 쿠바 뮤지션 부에나비스타 소셜클럽, 혁신적 무용가 피나 바우쉬, 프란치스코 교황 등을 담은 다큐로 연출 반경을 넓혀왔다. 2019년 키퍼와 재회한 그는 한때 오해와 편견에 가려있던 키퍼의 예술인생을 다큐로 제작하기로 한다. 이후 2년간 녹취록만 1000쪽 넘는 분량의 인터뷰를 진행하며 1940~50년대 독일에서 자란 키퍼의 유년기 재현이 꼭 들어가야 한다고 확신하게 됐다. 다큐에서 키퍼의 젊은 시절 재현에 키퍼의 친아들을 캐스팅한 벤더스 감독은, 키퍼의 소년기 아역에는 자신의 조카손자를 출연시켰다. 벤더스는 글로벌 미술 매체 아트넷뉴스와 인터뷰에서 “당시 독일은 나치즘에 대해 침묵하는 ‘침묵의 시대’였다”면서 “안젤름과 나는 어린시절 나치 교사들에게 교육 받으며 자란 공통점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고 했다.
벤더스 감독은 독일을 떠나 미국·호주·일본 등 외국을 떠돌며 작품활동을 했다. 독일의 과오에 대해 혐오감에 휩싸여서였다.
반면 키퍼는 히틀러의 망령이 도사린 공간에서 진실의 파수꾼 역할을 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벤더스 감독은 그런 키퍼에게 일생의 영감이 돼준 두 가지에서 해답을 찾아간다. 그 중 하나는 고향 지역 영주의 성에서 전 세계 예술작품으로 가득 찬 방을 드나들며 예술의 순수한 아름다움에 눈뜬 순간이었고, 다른 하나는 홀로코스트에서 생존한 시인 파울 첼란과 잉게보르 바흐만의 시들이었다.
다큐 ‘안젤름’은 키퍼가 1992년부터 프랑스 남부 바르작에 조성한 예술 단지를 주 무대로, 전시된 작품들을 관통하는 기억과 기록이란 주제를 탐구했다. [사진 에무필름즈]
다큐에서 소년 시절 빈센트 반 고흐의 해바라기 그림을 통해 자연의 미학을 재발견한 키퍼는 첼란의 시에 눈뜬 중년이 되어 여름의 빛을 잃고 좀비처럼 말라버린 해바라기 밭을 다시 마주한다. 벤더스 감독은 첼란의 시 ‘죽음의 푸가’(1944~45 추정)에 영감 받은 걸로 알려진 키퍼의 대표작 ‘너의 금발, 마르가레테’(1981)의 탄생 과정을 다큐에서 이런 방식으로 재구성한다. 키퍼의 물러섬 없는 작품 활동이 일종의 순수성, 예술과 인간성을 향한 열정을 잃지 않고 지켜왔기 때문이란 걸 보여주는 장면이다.
다큐 ‘안젤름’은 지난 6일 앞서 개막한 ‘빔 벤더스 감독전-파트 2. 예술가의 영혼’ 상영회 일환으로 개봉했다. ‘피나’ ‘안젤름’ ‘도쿄가’ ‘룸 666’ 등 벤더스 감독의 다큐 4편을 모아 상영한다. 다만, 이번 개봉판은 2D 버전만 수입됐다. 벤더스 감독이 ‘안젤름’에서 전작 ‘피나’(2011)보다 진일보한 영상 기술로 구현한 입체 영상은 이번에는 볼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