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의 캄포 데 피오리 광장. 오전에는 노점들이, 오후가 되면 조르다노 브루노 동상 주변의 카페들이 활기를 띤다. [사진 비지트 로마 닷컴]
마트 진열대에서 생전 처음 보는 채소, 예를 들어 거대 완두콩을 발견했다고 치자. 어떤 행동을 할까? 요즘 같으면 대부분 스마트폰을 꺼내 사진을 찍고 AI에게 요리법을 물을 것이다. 정답까지 가는 데 5분도 안 걸린다. 그런데 이때 누군가 다가와서 “그건 생으로 먹어야 맛있어요. 내가 우리 농장에서 직접 기른 건데…”라며 다정한 참견을 한다면 어떨까? 시간은 좀 더 걸리겠지만, 우리의 장보기는 단순한 물건 구매를 넘어 식재료를 둘러싼 다채로운 대화의 장으로 변할 것이다.
핀란드 헬싱키, 시청 앞 마켓 광장인 ‘카우파토리(Kauppatori)’에서 이런 일을 겪었다. 가판대에서 발견한 완두콩이 신기해 살까 말까 주저하고 있었더니, 판매하는 상인이 대번에 껍질을 척척 까서 입에 쏙 넣어주는 게 아닌가. 와, 그런데! 완두콩을 생으로 먹는 것이 이토록 맛있는 줄은 미처 몰랐다. ‘헤르네(Herne)’라고 불리는 이 콩을 씹으면 과일처럼 달콤한 즙이 톡 터진다. 핀란드에 머무는 내내 봉지째 들고 다니며 우물우물 먹었다.
[일러스트 조성익]
이런 다정한 참견, 이른바 ‘오지랖 장보기’가 공식적으로 벌어지는 도시 공간이 있다. 유서 깊은 도시를 여행하다 종종 마주치게 되는 생산자와 소비자의 직거래 현장, 바로 ‘농부 장터(파머스 마켓)’다. 우리의 감정과 행동을 긍정적으로 변화시키는 인생 공간, 이번에는 인간미 넘치는 쇼핑의 현장인 ‘도심 속 농부 장터’ 이야기다.
농부 장터, 도심 속의 훌륭한 대안 학교 이런 유쾌한 장터가 열리려면 도시에 어떤 공간이 있어야 할까. 모든 도시의 어머니, 로마로 가보자. 관광객으로 붐비는 거리를 살짝 벗어나면 로마 시민들의 일상을 마주할 수 있는 ‘캄포 데 피오리(Campo de’ Fiori)’ 광장이 기다린다. 1869년부터 시작된 로마 최고(最古)의 시장이 매일 이른 아침 이곳에서 열린다.
고대 로마의 천재적 발명품인 광장에는 전형적인 공식이 있다. 정면에 흰 대리석으로 치장한 웅장한 교회가 서고, 그 앞으로 넓은 공간이 펼쳐진다. 맞은편 노천카페에 앉아 이 거룩하면서도 인간적인 풍경을 바라보는 것이 이탈리아 여행의 큰 즐거움이다. 그런데 캄포 데 피오리는 로마의 주요 광장 중 유일하게 성당이 없는 곳이다. 광장 중앙에는 우주가 무한하다는 파격적인 주장을 펼치다 바로 이곳에서 화형 당한 조르다노 브루노의 동상만 덩그러니 서 있을 뿐, 사방이 평범한 건물로 에워싸인 공터에 불과하다.
흥미로운 건 이 ‘비어있음’이 극적인 공간 변화를 만든다는 점이다. 아침이면 빈 광장에 소규모 상인들이 들어차 왁자지껄한 장터가 열리지만, 오후 2~3시 무렵이면 좌판이 마법처럼 싹 정리되고 노천식당과 바 테이블이 그 자리를 채운다. 아침과는 전혀 다른, 세련되고 낭만적인 분위기로 180도 바뀌는 게 캄포 데 피오리의 가장 큰 매력이다. 브루노 동상 앞 카페에 앉아 ‘아페리티보(식전주)’를 한 잔 하며 공간 일기장에 스케치를 하노라면 ‘아침에 시끌벅적하던 그곳이 맞나’ 내 눈을 의심할 정도다.
같은 광장이 시간대별로 완벽하게 변신할 수 있는 이유는 이곳이 애초에 특별한 무언가를 채워 넣지 않은 공간이기 때문이다. 거창한 랜드마크 대신 평범한 건물들이 둘러서서 강한 바람을 막아주고, 그림자를 드리우며, 배경으로 묵묵히 물러나 준 덕분이다. 건축가들이 말하는 이른바 ‘공간의 유연성’이야말로 캄포 데 피오리가 수백 년간 시민들의 사랑을 받아 온 이유다.
텅 빈 잔디 광장 둘레로 지붕만 단정하게 두른 목동 오목공원의 ‘회랑’. 특정한 기능을 억지로 채우지 않은 여백 덕분에 주말이면 활기찬 농부 시장으로 유연하게 변신한다. [사진 조성익]
우리에게도 이런 공간이 있다. 평일에 가본 양천구 목동의 ‘오목공원’은 참 이상한 공원이었다. 텅 빈 광장의 가장자리에 지붕을 두른 것이 공원의 전부다. 이른바 ‘회랑’이라 부르는 지붕이 있는 복도인데, 그 아래에 특별한 기능이랄 게 없었다. 이 금싸라기 같은 도심 땅에 번듯한 숲을 만들든가 시민들에게 필요한 시설을 지을 것이지, 왜 이토록 휑한 콘크리트 구조물을 두었나 싶다.
하지만 농부 시장 ‘마르쉐’가 열리는 주말에 가보면 그제서야 왜 공간을 비워두었는지 알게 된다. 사방을 두른 회랑 아래로 농부들의 왁자지껄한 간이 판매대가 채워진다. 사람들은 그 주변을 빙글빙글 돌며 향긋한 봄나물을 사고, 딸기 주스와 발효종 빵을 한 덩어리 고른다. 그리고는 회랑 밖 벤치에 앉아 여유롭게 간식을 나눠 먹는다. 회랑에 특정한 목적을 채워 넣지 않았기에 주변을 도는 ‘빙글빙글 장터’가 들어 설 수 있었던 것이다.
이 공원을 설계한 조경가 박승진은 공원에 ‘건축을 채우기보다 사람들의 행동을 채우기’를 바랐다고 한다. 예술 작품이 걸려야 비로소 의미를 가지는 미술관처럼, 비워진 광장에 인간 행태를 전시하는 미술관을 만든 것이다. 비와 햇빛만 가려주는 최소한의 뼈대만 만들었기에 주말이면 장터가 되고, 때로는 감미로운 음악 공연장이 되며, 인근 직장인들이 샌드위치를 먹으며 이야기하는 휴식장소가 된다.
이 유연한 회랑 아래에선 어떤 인간적인 대화가 오가고 있을까. 현장에서 유독 눈길을 끈 것은 가판대 앞에 사람들이 모여 대낮부터 기분 좋게 낮술을 즐기는 모습이었다. 자연스럽게 합류해 맥주를 주문하고 사장님과 이야기를 나눴다. 알고 보니 마르쉐가 낳은 스타 농부, ‘이히브루(ICH BREW)’였다. 충남 홍성에서 유기농법으로 재배한 곡식을 팔던 평범한 농부는 이곳 마르쉐에서 소비자와 직접 마주하다가 아이디어를 얻었다고 한다. 단순한 농작물을 넘어 2차 상품을 만들어야겠다는 깨달음이었다. 결국 온 가족이 열정을 모아 맥주 양조자로 멋지게 변신했다.
뉴욕 그린 마켓처럼 농부 장터 만들어야 또 다른 판매자 ‘페스토 페스토’는 이탈리아 소스인 페스토를 우리나라 제철 채소로 만든다. 장터가 끝날 무렵 농부들에게 남은 채소를 저렴하게 구입하거나, 영양가가 풍부하지만 아깝게 버려지는 당근 잎 등을 모아 새로운 페스토를 실험해 본다고 한다. 물건만 달랑 사는 백화점과 달리, 호기심 많은 마르쉐의 손님들이 있기에 신제품을 시험해 보기에도 좋다고. 그들에게 마르쉐는 농부와의 협업으로 신제품 아이디어를 내고 고객 반응을 살펴보는 실험장인 셈이다.
이렇게 판매자들의 사연을 길게 들을 수 있는 데는 다 이유가 있다. 마르쉐에는 농부든 요리사든 반드시 생산자 대표가 직접 장터에 나와야 한다는 규칙이 있다. 그래야 식재료를 어떻게 길러내고 요리했는지, 주인의식을 갖고 손님들과 소통할 수 있기 때문이다.
“농부 장터는 단순한 판매 시설이 아니라 시민 교육 기관입니다.” 마르쉐를 이끌어온 이보은 대표의 말이다. 빠르고 저렴하게 물건을 사는 것이 목적이라면 대형 마트나 온라인 쇼핑을 이용하면 된다. 그러나 농업 현장과 멀어진 도시인, 농부를 한 번도 마주치지 못한 채 자라는 어린이들에게 이 농부 시장은 훌륭한 대안 학교가 된다. 생태계를 존중하는 태도, 산업 구조에 대한 이해, 환경을 생각하는 건강한 식습관까지. 이 장터에서 장을 보는 일만으로도 우리는 스스로를 조금 더 성장시킬 수 있다. 이것이 농부 시장이 필요한 이유이자, 가끔은 장터에서 장을 봐야 하는 이유다.
최근 취임한 강미선 마르쉐 이사장과 새콤한 밭딸기를 사려고 줄을 서며 이야기를 나눴다. “우리도 이제 이런 장터가 열리는 고정된 광장이 생길 때가 됐다.” 앞서 살펴본 헬싱키와 로마의 사례만 있는 것이 아니다. 뉴욕의 그린 마켓, 런던의 버로우 마켓, 도쿄 아오야마 파머스 마켓처럼 대도시들은 어딘가 한 켠에 농부 시장을 두고 도시에 활력을 불어넣는다. 방탄소년단(BTS)이 공연을 펼친 광화문 광장. 이제 우리는 번듯한 국가적 상징 광장을 가졌다. 이제 스타 농부가 다정한 오지랖을 펼치는 상설 농부 광장이 우리 도시 어딘가에 하나쯤 필요하다.
눈부신 5월, 다음 마르쉐 농부 시장은 16일 서울 장충동 국립극장에서, 23일 동대문 DDP에서 열린다. 낯선 식재료를 집어 들고 농부에게 먼저 말을 건네 보시라.
조성익 건축가. 홍익대 교수이자 TRU 건축사무소의 대표 건축가다. 맹그로브 숭인 코리빙으로 한국 건축문화대상 대통령상을 수상했다. 공간과 삶, 그리고 사람에 대한 애정으로 책 『건축가의 공간 일기』를 출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