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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설계도 없어 새로 그려”…30년 된 LA전동차, K기술로 새차 됐다

중앙일보

2026.05.19 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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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송철도종합시험선에서 대기 중인 LA 메트로 차량. 사진 우진산전

오송철도종합시험선에서 대기 중인 LA 메트로 차량. 사진 우진산전

지난 13일 오후 3시께 세종시 전동면에 위치한 전동역. 지금은 폐지된 옛 경부선의 간이역으로 한국철도기술연구원이 운영하는 오송철도종합시험선로 상에 자리하고 있다.

역 구내로 들어서자 앞부분이 노랗게 칠해진 전동차들이 눈에 띄었다. 국내 지하철보다 길이가 거의 2배쯤 되는 전동차 2량이 하나(2량 1편성)로 연결된 형태였다. 차량 옆에는 'Metro(메트로)'라는 영문이 크게 적혀 있었다.

전동차 실내는 조명과 도색이 말끔했고, 새것처럼 보이는 의자에는 비닐커버가 씌워져 있었다. 이들 전동차 3편성은 시험주행을 위해 이곳으로 옮겨왔다. 전동역을 출발해 5분여를 달리는 동안 승차감도 부드러웠다.
조명과 바닥, 내장재를 교체해 말끔해진 LA 메트로 차량 내부. 강갑생 기자

조명과 바닥, 내장재를 교체해 말끔해진 LA 메트로 차량 내부. 강갑생 기자


얼핏 보면 외국에 수출하기 위해 새로 제작한 전동차 같지만 실제론 만들어진 지 무려 30년이 넘은 미국 LA(로스앤젤레스)의 지하철 차량들이다. 국내 중견 철도차량제작업체인 우진산전이 낡고 녹슨 전동차를 새차로 탈바꿈시킨 것이다.

우진산전이 LA 교통국이 발주한 노후 전동차 개량사업을 수주한 건 2024년 5월이었다. 대상은 기본 35편성(70량)에 옵션 2편성(4량)을 합해 모두 74량의 노후 전동차다.

외부 도색과 실내 내장재 교체·도색은 물론 추진제어전원과 열차제어 모니터링시스템· 냉난방시스템 교체 등 사실상 낡은 차량을 거의 새것처럼 만드는 작업이다. 계약금액은 약 2억 1360만달러( 약 3200억원).

국내 철도제작업체가 해외 노후 전동차의 부분개량이 아닌 전면개량에 도전한 건 이번이 처음이다. 야심차게 시작했지만, 난관의 연속이었다. 해당 차량은 이탈리아 업체가 30여 년 전 제작한 것으로 설계도도 온전히 남아있지 않았다고 한다.

앞서 2016년 유럽의 한 업체가 이 사업을 수주했다가 시험 실패와 소프트웨어결함, 공정 지연 탓에 6년 만에 계약이 강제 해지된 전력도 있었다. 그 뒤 해당 차량들은 사실상 방치돼 있었다. 이 때문에 국내외 업체 대부분이 참여를 꺼렸다고 한다.

미국에서 해당 전동차가 처음 들어온 건 지난 2024년 9월이었다. 배편으로 부산항까지 온 뒤 트럭으로 충북 증평의 공장까지 운반했다. 처음 전동차 안팎을 살폈던 공장 관계자들은 혀를 내둘렀다고 한다.

개량을 위해 우진산전 공장에 도착한 LA 메트로 차량. 사진 우진산전

개량을 위해 우진산전 공장에 도착한 LA 메트로 차량. 사진 우진산전

이흥표 우진산전 상무는 “워낙 오래되다 보니 실내에서 악취도 나고, 바닥 등도 오염이 심했다”며 “차량 밑에 들어갔다 나오면 작업복이 심하게 더러워질 정도로 먼지와 기름때 범벅이었다”고 전했다.

설계도도 일부만 남아있던 탓에 거의 신차를 만드는 수준으로 설계도를 다시 그렸다고 한다. 게다가 발주처에서 개량할 부분과 유지할 부분을 깐깐하게 나눠놓은 탓에 작업은 더 어려웠다. 이 상무는 “신차를 만드는 게 훨씬 쉽겠다고 할 정도였다”고 말했다.

이날 오전에 먼저 찾은 공장 한쪽에는 이들 전동차에서 떼어낸 노후 장치들이 쌓여 있었다. 대부분 녹슬고 기름때가 여기저기 붙어있는 상태였다. 이 장치들 대신 최신 제품으로 모두 바꿨다고 한다. 국내에 들여온 전동차는 모두 4편성(8량)이다.
개량 전(왼쪽)과 개량 후 LA 메트로 차량 내부. 사진 우진산전

개량 전(왼쪽)과 개량 후 LA 메트로 차량 내부. 사진 우진산전


이렇게 악전고투 끝에 전면개량을 끝낸 전동차들은 지난 4월부터 철도종합시험선로로 옮겨져 순차적으로 3000마일(약 4830㎞)의 시험운행을 하고 있다.

이어 올해 말께 미국으로 보내 현지 시험운행도 거치게 된다. 우진산전은 4편성은 국내에서 개량하고, 나머지 33편성은 미국 캘리포니아 카슨에 설립한 현지공장에서 작업을 이어갈 계획이다.

신제천 우진산전 상무는 “미국 측 관계자들이 개량이 끝난 차량을 보고는 '이게 정말 우리 차가 맞느냐'고 놀라워한다"며 “LA 당국에선 2028년 7월 개막할 올림픽에 맞춰 개량 전동차들을 투입할 예정인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전면개량을 마친 LA 메트로 차량. 강갑생 기자

전면개량을 마친 LA 메트로 차량. 강갑생 기자

노후 전동차 개량사업엔 국토교통부와 국가철도공단, 한국철도기술연구원의 전폭적인 지원도 큰 힘이 되고 있다. 우진산전이 해당 사업을 성공적으로 완수하게 되면 국내 철도업계가 신차 제작은 물론 해외 차량 개조까지 사업분야를 대폭 확대하는 기폭제가 될 거란 전망이다.

현대차 계열인 현대로템이 신차 위주로 미국시장을 공략하는 가운데 우진산전이 노후 차량 개량이라는 틈새시장을 개척하는 모양새가 되는 셈이다. 앞서 현대로템은 미국에서 8건의 전동차 및 이층객차 제작사업을 따냈다.

1974년 철도부품 업체로 시작한 우진산전은 2005년 부산지하철 4호선 경전철 수주를 시작으로 대구도시철도 3호선(모노레일), 광주도시철도 2호선, 서울지하철 5·7호선, 코레일 전동차, 위례선 트램 등을 수주하거나 납품했다.

김정현 우진산전 대표는 “노후 차량 개량사업은 새차 제작보다 훨씬 까다롭다”며 “이번 사업을 발판으로 보다 적극적으로 해외 철도시장에 진출할 생각”이라고 밝혔다.



강갑생([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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