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상의 무속인 ‘조말례’에게 심리적 지배(가스라이팅)를 당해 회삿돈 약 66억원을 빼돌려 바친 유명 생활가전 업체의 전직 대표가 1심에서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20일 법조계에 따르면 서울남부지법 형사합의15부(부장 노유경)는 지난달 28일 특정경제범죄 가중처벌 등에 관한 법률 위반(횡령) 혐의를 받는 생활가전 업체 전직 대표 A씨에게 징역 3년을 선고했다. 재판부는 “A씨가 무속인 측으로부터 ‘제단에 바칠 돈이 필요하니 가져오라’는 지시를 받고, 이사회 승인 없이 회삿돈 65억8700만원을 횡령했다”며 “대표이사로서 책임을 다 했어야 하는 피고인이 무당의 말을 맹목적으로 추종해 거액을 빼돌리는 등 범행 규모와 방식을 고려하면 죄질이 매우 나쁘고 비난 가능성이 높은 사안”이라고 판단했다.
재력가 A씨는 어쩌다가 무당의 지시를 받는 신세가 됐을까. 검찰에 따르면 이 사건은 2017년 서울의 한 사립초등학교 학부모 모임에서 A씨의 아내 B씨가 장모(50)씨와 만나게 되면서 시작됐다. 장씨는 B씨가 가전 업체 창업주의 며느리라는 사실을 알게 되고, 이후 부부 모임을 지속 제안하며 약 1년간 친분을 쌓았다. 이후 2018년 A씨 부부가 아들의 건강 문제를 털어놓자, 장씨는 “고위층 사주를 봐주는 유명 무속인이 있다”며 조말례라는 인물을 소개했다. 이후 조말례가 A씨 부부 아들의 증상을 정확히 짚어내자, A씨 부부는 장씨를 점점 신뢰하게 됐다.
하지만 조말례는 장씨와 장씨의 전 남편 심모(48)씨가 만들어낸 가상의 인물이었다. 장씨 등이 A씨 부부와 만나며 알게 된 사실을 바탕으로 조말례인 척 행세를 한 것이다. 부부는 조말례와 문자 메시지로만 소통하며 속아 넘어간 것으로 조사됐다. 장씨 등은 B씨에게도 같은 방식으로 2018년부터 2020년까지 약 40차례에 걸쳐 아파트 지분과 현금 등 약 87억원을 빼앗았다.
서울 양천구 서울남부지방검찰청의 모습. 뉴스1
이같은 사실은 서울남부지검이 보완수사 끝에 밝혀냈다. 검찰은 지난 2월 장씨 일당을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상 사기·공갈 등 혐의로 구속 기소했다. 장씨 일당 관련 다음 공판 기일은 다음달 12일 열릴 예정이다. 검찰 관계자는 “검찰에서 약 20년간 근무하면서 이처럼 충격적인 사건은 처음 봤다”고 말했다.
다만 A씨 측은 지난 4일 항소장을 제출했다. 법원에 따르면 A씨 측은 재판에서 “회사에 횡령금 전액과 이자액을 더한 금액의 대물 변제를 완료했고, 잘못을 인정하고 반성하고 있다”는 입장을 밝혔다고 한다. 해당 가전업체 또한 “A씨의 처벌은 원치 않는다”는 의사를 재판부에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