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직 전 막역했던 거래처 사장님을 우연히 만나 반갑게 악수를 하자 사장님은 웃으며 이렇게 말을 건넸다. 내 손바닥의 딱딱한 굳은살이 느껴진 모양이다.
" 아녜요. 저 요새 청소합니다. 장비 잡다 굳은살이 박혔네요. "
내 대답에 그분은 깜짝 놀라더니 연신 “대단하시다”고 엄지손가락을 추어올렸다. 나는 내친김에 “저는 이제 ‘청소하는 김언일’입니다”라며 새 명함을 건네고는 활짝 웃었다.
난 LG생활건강에서 부장·팀장, 한국콜마 등 화장품 중견기업에서 임원으로 일하다 51세에 자발적 퇴사를 했다. 그리고 3~4개월의 준비 과정을 거쳐 지금은 1인 청소업자가 됐다.
김언일 희빛클린 대표가 고객의 집을 방문해 침대 매트리스의 뒷면까지 청소하고 있다. 유튜브 캡처
내 변신에 가족과 지인들은 모두 당혹스러워했다. 비즈니스 정장 차림에 까만 법인 차량을 타고 다니던 아빠 모습에 익숙한 중학생 딸은 청소 장비를 든 날 보더니 “아빠가 왜요?”라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내 역시 “평생 책상 앞에서 일해온 당신이 몸 쓰는 일을 할 수 있겠어요?”라고 걱정했다. 몇몇 지인은 내 모습을 일종의 ‘신분 추락’으로 여겨 안타까워했다.
하지만 내겐 다 계획이 있다. 내게 청소는 ‘기회의 땅’이다. 직장생활을 통해 배운 모든 역량, 앞으로의 시간·땀·정성을 다 쏟아부어 이 분야에서 이루고 싶은 나만의 꿈이 생겼다.
「
화장품 회사 임원에서 청소부 된 사연
」
문득 내 주변을 둘러봤다. 카펫·소파·커튼…. 매트리스처럼 매번 세탁할 수 없는 대형 패브릭 제품이 널려 있었다. “집집마다, 사무실마다 소파·매트리스·카펫이 다 있는데, 한국엔 이 물건들을 청소한다는 개념이 잘 없구나. 이 시장을 잡으면 꽤 크겠는데”라는 생각이 번뜩 들었다.
이 시기, 직장에선 실적 압박이 엄청났다. LG생활건강에서 일하다 중견 화장품 기업의 임원으로 이직한 시점이 하필 코로나19 절정기였다. 언택트, 재택근무가 뉴노멀이 되면서 화장품 판매량은 고꾸라졌다. 내가 아무리 열심히 뛰어도 예년 실적을 달성하는 건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날이 갈수록 심해지는 매출 압박에 스트레스는 날로 가중됐다. 퇴근해도, 잠자리에 들어도 업무에 대한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불면증과 불안 증상 등 건강에도 빨간불이 켜졌다.
김언일 희빛클린 대표가 고객 집을 방문해 침대 매트리스 세척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유튜브 캡처
" 사실 퇴직에 대한 고민은 40대 중반부터 머릿속을 떠난 날이 없었죠. 인생 2막을 위해 공인중개사 자격증도 취득해 놓긴 했는데 부동산 경기도 계속 안 좋잖아요. ‘이거다’ 싶은 분야를 못 찾고 있었는데, 뜬금없이 청소가 눈에 들어온 거죠. "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당장 그해 말, 회사에 임원 재계약을 하지 않겠다는 의사를 밝히고 자발적으로 퇴사했다. 그리고 퇴직 첫날부터 청소 교육을 받으러 갔다.
" 사업 아이템을 정해 놓고 퇴사를 했기 때문에 퇴직 우울증이니 뭐니 이런 걸 느낄 이유도, 여유도 없었어요. 하루라도 빨리 시작해야 했죠. "
청소 관련 자격증도 차근차근 땄다. 현재 내가 가진 청소 관련 민간자격증은 청소전문가(한국자격검정평가진흥원), 에어컨 세척 및 유지·관리 마스터(한국냉난방기유지관리사협회) 등이다.
장비도 하나씩 갖춰나갔다. 에어컨 청소 장비(170만원), 유리창 청소 장비(100만원) 등은 바로 구매했지만, 매트리스 등 패브릭 가구 세척 장비는 800만원이 넘는 고가여서 월 10만원에 렌트해 쓰고 있다. 교육비, 장비 구매 등 다 합쳐도 초기 투자비는 300만원이 채 안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