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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쳐도 산재 안돼”…하루 72홀 마라톤 골프, 강제 완주한 사연

중앙일보

2026.05.23 02:22 2026.05.23 1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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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인 72 로고가 붙은 카트. 성호준 기자

철인 72 로고가 붙은 카트. 성호준 기자

새벽 5시의 소집
어느 날, 클럽72 골프장을 운영하는 KX그룹의 남호균 전무라는 낯선 분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내 책을 감명 깊게 읽었다는 그는 클럽72(구 스카이72)에서 열리는 '철인 72 골프대회'에 나를 초대했다. 하루 만에 클럽72의 4개 코스를 모두 도는, 그야말로 '마라톤 골프' 도전이었다.

과분한 칭찬에 으쓱해진 나는 덜컥 참가하겠다고 답했다. 편집국장에게 보고했더니 돌아온 반응은 이랬다. "하루에 72홀을 도는 게 시간상 가능하긴 합니까? 몸은 버텨낼 수 있겠어요? 가도 좋은데, 다쳐도 산재 처리는 안 됩니다." 농담조였지만 뼈가 있었다.

그제야 잊고 있던 내 아킬레스건이 떠올랐다. 나는 올해 초까지 무릎 통증으로 고생했다. 지난해 PGA 투어를 6개월간 현지 취재하며 무릎을 다친 탓이었다. 정형외과에서는 연골이 다 닳았다며 줄기세포 주입 및 뼈 교정 수술 후 1년간 재활해야 한다고 진단했다. 수소문 끝에 유능한 물리치료사를 만나 간신히 통증을 잠재워 둔 상태였는데, 72홀을 돌다 무슨 일이라도 생길까 겁이 났다.

설상가상으로 무거운 물건을 들다 왼쪽 손목까지 삐끗해 인대 통증까지 얹혔다. 대회 전날 밤, 신병교육대 시절 40km 행군을 앞두고 느꼈던 바로 그 막막함 탓에 밤새 잠을 이루지 못했다.

새벽 5시 출발을 앞두고 기념촬영을 한 참가자들. 제일 왼쪽이 필자. 사진 클럽72

새벽 5시 출발을 앞두고 기념촬영을 한 참가자들. 제일 왼쪽이 필자. 사진 클럽72

골프 마라톤의 역사
그럼에도 '골프 마라톤'에 대한 호기심을 지울 수 없었다. 2009년, 중앙선데이 연재를 위해 스코틀랜드로 한 달간 취재를 갔을 때 하루에 4라운드나 6라운드를 도는 괴짜들을 본 적이 있다. 백야 현상으로 새벽 4시부터 밤 11시까지 환한 스코틀랜드의 여름은 시간상 충분한 도전이었다. 한국처럼 골프장이 붐비지 않아 라운드 시간도 짧았다.

사실 골프의 역사는 내기로 인해 풍성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골프의 고향 스코틀랜드에서는 초창기부터 온갖 이색적인 내기가 성행했다. 세계 최고 권위의 '디 오픈 챔피언십'조차 "우리 골프장이 더 좋고, 우리 클럽 프로가 너희 클럽 프로보다 세다"라며 몇몇 명문 골프장 회원들이 벌인 자존심 내기에서 태동했다.

골프 마라톤 역시 단골 내기 소재였다. 1875년 애버딘 골프클럽에서는 "24시간 내에 12라운드를 돌고, 16km 떨어진 집까지 걸어서 귀가할 수 있는가"를 두고 역사적인 내기가 벌어졌다. 윌리엄 블록샘이라는 이가 이 무모한 도전에 성공하며 당당히 내기를 이겼다.

시간이 흐르며 골프 마라톤 기록은 경이로운 수준으로 발전했다. 카트를 타지 않고 순수하게 걸어서 달성한 하루 최다 라운드 기록은 무려 252홀(14라운드)이다. 주인공은 7번 아이언 단 한 자루만 쥐고 필드를 뛰어다니며 라운드당 평균 49분, 평균 76.3타로 코스를 주파했다. 카트를 타고 달성한 세계 최다 기록은 851홀이다.

캐나다의 프로 롭 제임스가 세운 기록인데, 그는 이전에도 당시 세계 기록인 846홀 돌파에 세 차례 도전했다가 실패한 적이 있었다. 훗날 밝힌 실패 원인이 걸작이다. "휴대용 변기를 너무 자주 쓰는 바람에 시간을 지체했다"는 것이다. 이 어마어마한 홀을 소화하려면 소변 보는 시간조차 아껴야 한다는 뜻이다.

나 역시 골프 마라톤의 역사적인 순간을 눈앞에서 목격한 적이 있다. 2024년, 제주에 사는 신은찬 씨가 스크린골프에서 무려 40라운드(720홀)를 완주하며 세운 최다홀기록이다.

왼쪽부터 이윤정 KBS 아나운서, 텔렌트 왕빛나, 이윤미. 성호준 기자

왼쪽부터 이윤정 KBS 아나운서, 텔렌트 왕빛나, 이윤미. 성호준 기자

셀럽들 사이의 기자
대회 당일 새벽 5시, 골프장에 집결해 식사를 마쳤다. 주위를 둘러보니 나를 제외하면 온통 '셀럽'들뿐이었다. 내 동반 플레이어는 신태용 전 인도네시아 축구대표팀 감독, 뮤지컬 배우 민우혁, 배우이자 연예인골프협회장인 원기준 씨였다. 왕빛나, 이윤미 등 골프 애호가로 소문난 여성 연예인들도 보였다.

첫 홀에서 나는 '개버디'라는 말을 처음 알게 됐다. 돈을 따고 잃는 내기와 무관한 첫 홀이나 마지막 홀에서 나오는, 동반자들에게 돈도 못 받는 '쓸데없는 버디'를 은어로 그렇게 불렀다. 원기준 씨가 첫 홀에서 그 '개버디'로 포문을 열었다. 카메라는 줄곧 여성 셀럽 팀을 좇다 몇 홀이 지나서야 우리 팀을 비추기 시작했다. 카메라 울렁증 탓인지 렌즈가 다가오자 샷이 급격히 흔들렸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손목 통증마저 찾아왔다. 어드레스를 서고 클럽을 들어 올릴 때마다 손목이 시큰하게 울렸다.

민우혁은 72홀 라운드를 하는 동안 여러 차례 이글 퍼트를 했다. 성호준 기자

민우혁은 72홀 라운드를 하는 동안 여러 차례 이글 퍼트를 했다. 성호준 기자

야구선수였던 뮤지컬 배우
이번 대회에서 동반자로 만난 뮤지컬 배우 민우혁은 3번 아이언으로 무려 230m를 날려 보냈다. 엘리트 주니어 선수를 제외하고, 내가 지금껏 본 아마추어 중 가장 거리가 많이 나는 골퍼였다. 직선거리 284m인 파4 15번 홀에서는 티샷을 핀 옆 2m에 붙여 이글을 잡아냈다.

188cm의 탄탄한 몸이라해도 범상치 않다 싶었는데, 라운드 중 대화를 나눠보니 야구선수 출신이었다. 군산상고 1학년 시절 어깨 부상으로 2년을 쉬었고, 이후 LG 트윈스에 신고선수로 입단했다가 끝내 유니폼을 벗었다. 길거리 캐스팅으로 가수의 길에 들어섰지만, 10년이 넘는 무명 시절을 견뎌낸 끝에야 지금의 스타덤에 오른 대기만성의 인물이었다.

민우혁은 담담하게 지난날을 회상했다. "운동할 때는 세상에서 그게 제일 힘든 일인 줄 알았어요. 부상으로 그만두어야 했을 때는 세상이 다 끝난 것만 같았죠. 그런데 10년의 무명 생활을 버텨내며 깨달았습니다. 세상엔 힘든 일이 참 많다는 걸요. 그래도 낙담하지 않고 열심히 살다 보니 결국 이겨내게 되더라고요." 스코어 한 타에 연연하지 않고 호쾌하게 필드를 즐기는 그의 묵직한 아우라는, 그 모진 세월을 이겨낸 내공에서 나오는 것이었다.

라운드 도중 왼손목에 태이핑을 한 기자.

라운드 도중 왼손목에 태이핑을 한 기자.

대인배 감독의 테이핑
홀이 거듭될수록 체력이 소진되고 집중력이 떨어지자, 신태용 감독과 원기준 씨는 필드를 달리기 시작했다. "이렇게 몸을 움직여야 정신이 든다"며 서로를 독려했다. 그러더니 원기준 씨는 60번째 홀 즈음에서 홀인원을 기록했고, 신 감독은 5연속 버디를 낚는 기염을 토했다. 상황이 어려워야 안다. 내 동반자들은 모두 무시무시한 인물들이었다.

30홀을 넘어설 무렵, 신 감독은 손목을 잡고 찡그리던 내게 다가와 정성스럽게 키네시오 테이핑을 해주었다. 통증이 한결 가라앉았다. 사실 나는 신 감독을 대하기가 마음 한구석으로 다소 껄끄러운 처지였다. 두 달 전쯤 우리 부서에서 그를 비판하는 날 선 기사를 보도했기 때문이다.

내가 데스크로서 출고한 기사였다. 신 감독은 라운드 내내 기사에 대한 내색을 전혀 하지 않았다. 50홀쯤 지났을 때, 한 내장객이 신 감독을 알아보고 사인을 요청하며 "앞으로 어떤 행보를 보여주실 거냐"고 물었다. 그러자 신 감독은 넌지시 나를 가리키며 웃었다. "저기 계신 기자분한테 물어보세요." 진즉 알아보고 있었으면서도 무안하지 않게 배려하고, 손목이 아프다니 기꺼이 테이핑까지 붙여준 그의 대인배다운 면모에 감사했다. (그래도 기사 논조는 양보할 수 없다!)

잔디의 이치, 인간의 이치
홀이 거듭될수록 육체와 정신의 집중력은 서서히 바닥을 드러냈다. 그러나 그제서야 비로소 다시 깨달은 진리가 있다. '좋은 코스'와 '좋은 사람'은 꺼져가는 인간의 정신을 다시 세차게 깨운다는 사실이다.

처음 돌았던 하늘코스는 수려하면서도 짜임새 있게 재미있었고, 세 번째 맞이한 오션코스는 험난하면서도 도전 욕구를 자극했다. 신기하게도 이 두 코스에서 통증이 덜했다. 정신이 바짝 들면서 스코어는 오히려 평이한 코스보다 좋았다. 특히 오션코스에서 만난 캐디의 한마디는 깊은 여운을 남겼다.

클럽72에는 오션코스만 전담하는 캐디들이 따로 있다. 전장이 길고 험해 공을 잃어버리는 일이 부지기수라 캐디들에게도 고된 코스다. 슬쩍 힘들지 않냐고 물었더니, 되레 반문했다. "코스가 참 재미있지 않나요?" 플레이어야 재미있겠지만 시중을 들어야 하는 캐디에겐 고역일 텐데, 코스가 단조롭지 않아 일하는 자신도 즐겁다고 했다.

"오션코스를 찾는 손님들은 대개 골프의 깊이를 잘 알고 매너가 좋은 분들이 많아 보람차다"고도 덧붙였다. 위대한 코스는 그곳을 밟는 골퍼뿐만 아니라, 그곳에서 일하는 스태프의 품격까지 함께 고양시키는 법이었다.

54홀을 마쳤을 때 무릎 통증이 극에 달해 진지하게 중도 포기를 고민했다. 그럼에도 마지막 72홀까지 기어이 버텨낼 수 있었던 건 클럽72의 이준희 대표 덕분이었다. 그는 새벽 5시반 첫 티오프부터 카트를 따라 끝없이 걸었다. 걸으며 필드의 쓰레기를 줍고, 떨어져 나간 뗏장(디봇)을 손수 보수했다. 손에는 줄곧 습기 측정기를 쥔 채 코스 곳곳의 잔디 상태를 세심하게 체크했다.
72홀 완주를 마치고 기념촬영을 한 참가자들. 사진 클럽72

72홀 완주를 마치고 기념촬영을 한 참가자들. 사진 클럽72

"잔디에 물을 너무 과하게 주면 뿌리가 수분을 찾아 땅속 깊이 내려갈 이유가 사라집니다. 결국 뿌리가 얕아져 자생력을 잃고 유약해지죠. 물을 많이 주면 자원도 낭비되지만, 잔디 자체도 병충해에 취약하고 건강하지 못하게 됩니다."

사실 36홀만 돌고 대충 도망갈 궁리를 하던 나였다. 적당히 안락함만 찾으면 인간의 정신 역시 깊어지지 못하고 유약해진다는 잔디의 이치가, 마치 내 얄팍한 속내를 꿰뚫는 일침처럼 들려 발걸음이 멈칫했다. CEO가 새벽 1시까지 묵묵히 필드를 걸으며 동행하는데, 감히 기자라는 자가 도망칠 순 없는 노릇이었다.

그의 무언의 동행에 이끌려 기분 좋은 '강제 완주'를 마쳤다. 그날 필드 위에는 부상을 딛고 무명을 견딘 배우, 악평 기사를 쓴 기자에게 테이핑을 붙여준 감독, 새벽 1시까지 잔디를 걷는 CEO, 자신의 직업에 자긍심을 가진 캐디가 있었다. 좋은 코스는 좋은 사람들을 불러 모은다. 그리고 좋은 사람들은 지쳐가는 기자의 발걸음을 포기하지 못하게 만든다.

성호준([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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