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식탁에 앉지 못하면 메뉴판에 오르게 된다. 강자는 편할 때 스스로를 국제 질서의 예외로 만들고, 무역 규칙을 비대칭적으로 집행한다. 강압에 맞서 중견국(middle power)이 힘을 모으자.” "
마크 카니(61) 캐나다 총리의 올해 1월 스위스 다보스 포럼 연설이다. 그는 30분 동안의 연설에서 ‘미국’과 ‘트럼프’를 한 번도 언급하지 않았다. 하지만 강자가 누구인지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G7(미국·일본·독일·영국·프랑스·이탈리아·캐나다 등 주요 7개국)에 속하지만, 강대국이라기엔 다소 어색한 캐나다의 도발이었다.
카니 총리의 도발에 대한 미국의 ‘뒤끝’은 현재진행형이다. 미 국방부(전쟁부)는 지난 18일(현지시간) 캐나다와 영구합동방위위원회(PJBD) 참여를 중단한다고 발표했다. PJBD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인 1940년 프랭클린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과 윌리엄 라이언 매켄지 킹 캐나다 총리가 서명한 안보 협정이다. 미 국방부는 카니의 다보스 포럼 연설을 중단 이유로 들었다.
‘금융 엘리트’ 출신 중앙은행장
카니는 1965년 캐나다 노스웨스트 준(準)주 포트스미스에서 태어났다. 학창시절 아이스하키를 즐겼다. 미국 하버드대(학사)를 거쳐 영국 옥스퍼드대(석·박사)에서 경제학을 공부했다. 글로벌 투자은행(IB) 골드만삭스를 첫 직장으로 택했다. 런던·도쿄·뉴욕에서 10여 년간 신흥시장과 국제 채권시장을 다뤘다.
카니는 2003년 캐나다로 돌아왔다. 중앙은행 부총재로 공직에 입문했다. 2007년엔 ‘G7 최연소’(42세) 중앙은행 총재에 올랐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가 닥치자 빠르게 금리 인하와 유동성 공급을 밀어붙였다. 캐나다 경제가 선방하자 그의 몸값도 따라 올랐다.
영국 중앙은행인 영란은행이 2013년 ‘외국인’ 카니를 총재로 스카우트했다. 당시 스티븐 하퍼 캐나다 총리는 “캐나다 경제가 훌륭하니까 우리 인재를 데려간다”고 말했다. 영란은행 총재 시절인 2016년 ‘브렉시트(Brexit, 영국의 유럽연합 탈퇴)’ 국민투표가 가결됐다. 카니는 시장을 안정시키기 위해 금리를 내리고, 양적 완화(중앙은행이 국채·금융자산을 대규모 매입해 시중에 유동성 공급)를 시행했다. 브렉시트를 지지하는 진영은 그를 “지나치게 비관적인 관료”라고 비판했다. 하지만 그는 물러서지 않았다.
2020년 영란은행 총재에서 물러난 뒤 그는 현실 정치를 멀리했다. 유엔의 기후 변화 대책 및 금융 특사로 활동했다. 그를 정치 무대로 불러낸 건 2015년부터 집권한 쥐스탱 트뤼도 전 총리였다. 다양성, 포용, 기후 변화 대응을 앞세운 트뤼도는 카니와 코드가 잘 맞았다. 그러나 경제난과 장기 집권에 따른 피로감으로 리더십이 흔들렸다.
트럼프와 카니의 ‘악연’
자유당 경제고문으로 일하던 카니는 지난해 1월 사임한 트뤼도의 후임을 뽑는 자유당 대표 선거에 출마했다. 정계에선 미국·영국에서 경력을 쌓은 데다 ‘비주류’인 카니가 나라를 제대로 이끌 수 있겠느냐는 의구심이 컸다.
역설적으로 카니를 띄운 건 미국이었다. 트럼프는 캐나다를 “미국의 51번째 주(州)”라며 도발했다. ‘경제 위기 해결사’란 평가를 받는 카니가 주목받았다. 결국 카니는 같은 해 3월 자유당 전당대회에서 85.9% 득표율로 당 대표(총리)가 됐다.
유능한 경제 관료였던 카니는 다보스 포럼 연설을 필두로 미국에 맞서는 새로운 국제 질서를 기획하는 정치 투사로 떠올랐다. 점차 거세지는 각자도생의 흐름 속에서, ‘뭉쳐서 맞서자’는 그의 주장은 얼마나 큰 호응을 얻을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