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5일 찾은 서울시 금천구의 한 대형 마트. 평일 오전의 한가한 마트에서도 사람들이 제법 북적이는 곳이 있었으니 바로 국내 최초 창고형 약국으로 불리는 ‘메가팩토리’다. 마트 한 편에 자리하지만 약국 규모만 5752㎡(1740평)다. 입구에는 따로 사용할 수 있는 카트도 구비돼 있다.
입구 쪽 매장 안내도를 보니 영양제·상비약·생활건강·반려동물 등 종류별로 크게 나눈 구역만 9개. 가볍게 들러 아이쇼핑을 즐길 수 있을 정도로 상품 구성이 다채로웠다. 팝업이 열리는 이벤트존과 건강 관련 강좌가 열리는 도서관도 눈길을 끌었다. 마치 약과 건강에 관한 모든 것을 체험할 수 있는 약국판 대형 마트 같았다. 매장 분위기도 여느 약국과 달리 음악이 가득했다. 각종 약으로 가득한 선반 사이로 난 통로는 카트가 지날 수 있을 정도로 넓었다.
서울 금천구에 위치한 메가팩토리약국 전경. 쇼핑객들이 매장을 둘러보고 있다. 사진 메가팩토리
“약국계 코스트코 만들고 싶었다”
이곳을 만든 이는 서울 종로에서 20여년간 ‘온유약국’을 운영해 왔던 정두선 대표 약사. 정 약사는 “카운터형 약국이라는 기존 틀을 벗어나, 고객들이 마트에서 장을 보듯 자유롭게 약을 쇼핑할 수 있는 코스트코 같은 약국을 만들고 싶었다”고 말했다.
준비 기간은 4~5년. 기존 약국의 입지가 도심·병원 인근에 한정됐다면, 메가팩토리는 처음부터 교외형 아울렛으로 구상했다. 경기도 성남의 부지를 잡고 건물을 올려 지난해 6월 1호점을 낸 이유다. 해외 대표 대형 약국인 프랑스 몽주 약국이나 미국의 CVS 등 시장조사도 꼼꼼히 했다. 잡화점 같은 약국인 해외 드럭스토어 모델을 표방하지만, 국내 소비자들의 소비 패턴을 반영했다. 쇼핑은 자유롭게 해도 약에 관해 즉시 상담할 수 있도록 매장마다 약사 6~8명을 상주시켰다.
대형 마트와 비슷한 형식과 구성으로 고객들이 마치 장을 보듯 자유롭게 약을 쇼핑할 수 있는 공간으로 만들어졌다. 사진 메가팩토리
무엇보다 쇼핑 편의에 초점을 뒀다. 지나치게 빽빽하게 물건을 진열한 일본 모델과도 차별화했다. 카트를 끌 수 있을 정도로 널찍한 공간에, 약은 구역별로 종류를 나눠 일목요연하게 정리하고 가격표도 달았다. 소화제와 진통제만 수십 종류. 감기약도 증상별로 가능한 다양한 제약사의 약을 진열해 선택의 폭을 넓혔다. 유통 과정을 줄이고 물류 프로그램으로 재고를 관리해 가격도 합리적으로 맞췄다.
국내선 볼 수 없었던 리테일(소매점) 형식인 창고형 약국에 대한 소비자 반응은 뜨거웠다. 입소문이 나면서 주말엔 차량 대기가 생길 정도로 사람들이 몰렸다. 이후 비슷한 업태의 약국이 전국에 하나둘 생겨나기 시작했다. 규모와 방식은 조금씩 다르지만, 소비자들이 직접 카트를 끌며 약을 쇼핑할 수 있는 비교적 큰 규모라는 점은 대동소이하다. 시중 약국보다 저렴한 가격 정책도 소비자를 붙잡는 요소다.
업계는 현재 이런 마트형 대형 약국이 전국에 40여곳 이상 성업하고 있다고 파악하고 있다. 정 약사는 “소비자 반응이 오기까지 2~3년은 걸릴 것이라고 예상했는데 생각보다 반응이 빨랐다”며 “그동안 이런 업태에 대한 목마름이 있었던 것 같다”고 말했다.
외국엔 120년 역사 드럭스토어
국내선 이제 막 도입됐지만, 잡화점 형식의 약국은 해외서 흔하다. 약, 화장품, 간단한 먹거리 등을 한 공간에서 파는 복합 소매점 형태의 드럭스토어(Drug store)란 전문 용어도 있다. 원조는 1901년 미국 시카고에 문을 연 월그린(Walgreen) 1호점이다. 창업자 찰스 월그린은 당시 낡고 칙칙했던 약국을 밝게 꾸미고 통로를 넓혀 음료와 생활잡화를 함께 진열했다. 약국과 소매점을 결합한 혼종의 탄생이다.
드럭스토어 원조로 불리는 월그린의 초기 매장 모습. 사진 월그린 홈페이지
1963년 미국 매사추세츠주 로웰에 문을 연 CVS(Consumer Value Store)는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간다. 이름에 넣은 가치(value)가 표방하듯, 저렴한 가격과 셀프 서비스로 소비자 편의를 더했다. 1967년엔 매장에 본격적인 약국을 더하고, 1980년대를 거치며 전국적으로 대형화했다. 드라이브 스루를 적용한 매장도 등장하는 등 이용자 편의성을 극대화했다.
아시아에서 드럭스토어를 가장 정교하게 발전시킨 나라는 일본이다. 1932년 지바 현에 개인 약국인 ‘마쓰모토 약국’을 연 마쓰모토 키요시는 “아프지 않아도 들를 수 있는 약국”을 내세우며 건강과 미용을 일상적으로 챙길 수 있는 친근한 공간을 만들었다. 1987년에는 이 공간을 더 발전시켜 밝은 조명과 개방적인 입구, 화장품 테스트 공간 등 현대적 드럭스토어 브랜드 ‘마쓰모토 키요시’로 탈바꿈한다. 이후 교외 대형 매장 등으로 매장 형태를 다양화하면서 전국 체인으로 확장했다.
일본이 경우 다양한 드럭스토어 체인 브랜드가 존재한다. 사진은 일본 사이타마 현에 쿠마가야에 위치한 마츠모토 키요시 매장. 사진 마츠키요 코코카라 공식 홈페이지
일본에선 드럭스토어가 슈퍼마켓과 편의점의 영역까지 넘보고 있다. 약과 식품 매대를 한 곳에 두고 비교적 이익률이 높은 의약품에서 얻은 수익을 식품에 돌려 저렴하게 판매하는 구조다. 이런 수익 모델을 깔고 식품에 집중하는 편의점을 넘보고 있다. 일본 체인드럭스토어협회(JACDS)에 따르면 2024년 기준 일본 내 드럭스토어 시장 규모는 8조9199억엔(84조7000억원)으로 단순한 약국 업태를 넘어선 생활 플랫폼으로 자리 잡았다는 평가다.
올리브영·왓슨스도 시도했지만 실패
미국과 일본 드럭스토어가 진화해 나갈 때 국내서도 비슷한 시장이 형성됐던 적이 있다. 1990년대 후반과 2000년대 초반 CJ올리브영과 GS왓슨스 등이 드럭스토어 형식으로 국내 시장에 등장했지만, 의약품 판매는 사실상 포기해야 했다. 국내 약사법상 약국 개설은 약사에게만 허용되는데, 대기업이 이를 우회하려 한다는 약사 업계의 반발에 부딪혔기 때문이다.
올리브영은 2010년대 초반 약국 체인인 리드팜과의 협업 형태로 약국 시장 재진출을 노렸지만 ‘대기업 영리 법인 약국’에 대한 논란이 이어지면서 ‘헬스&뷰티 스토어’로 사업 모델을 전환했다. 이후 10여년간 국내에선 ‘의약품을 저렴하게 살 수 있는 대형 소매 채널’이라는 자리는 줄곧 비어 있었다. 소비자 수요는 있었지만 이를 채울 공급이 없었던 셈이다.
1999년 서울 강남구 신사동에 문을 연 올리브영 1호점 개점 행사 모습. 사진 CJ
최근 잇따라 생기고 있는 창고형 약국은 비약사 자본이 아닌 약사가 직접 만든 채널이라는 점에서 올리브영과 다르다. 약업계에서도 처방전 조제 수수료만으로 수익성이 악화하는 상황에서 병원에 종속되지 않은 약국 모델이 필요하다는 데 공감이 나온다.
무엇보다 소비자들의 수요가 명확하다. 고물가 기조 속에서 가격 민감도가 높아진 데다, 웰니스 트렌드가 확산함에 따라 건강기능식품 등 건강에 대한 관심 및 관련 수요가 폭발하고 있다. 한국건강기능식품협회에 따르면 2024년 기준 국내 건기식 시장은 6조440억원 규모로 전년 대비 16.8% 성장했다.
소비 패턴도 달라졌다. 건강을 자기 계발의 영역으로 여기는 2030 세대들이 건기식과 의약품의 주요 소비층으로 부상했다. 온라인 정보 확산으로 의약품 정보 격차가 줄면서 약사에게 먼저 묻기보다 스스로 검색·선택한 뒤 구매하는 소비자들이 늘었다. 각종 영양제나 상비약 등을 저렴하게 판매한다는 온라인 입소문이 돌면서 종로·남대문 등지에는 줄 서는 약국이 등장하기도 했다.
서울 홍대 인근에서 성업 중인 홍익 약국 전경. 외국인 관광객이 많다는 상권 특성을 살린 특화형 약국이다. 중앙포토
정부 규제 만지작…. 한국형 드럭스토어의 행방
확실한 수요와 이를 긁어주는 채널의 출현이라는 점에서 창고형 약국의 등장은 자연스러워 보인다. 다만 약국이 국민 건강을 책임지는 공간이라는 점에서 이런 창고형 약국이 공공성을 훼손하고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약사회 등 약업계 내부에선 의약품을 일반 공산품처럼 인식하게 하고, 남용하게 할 우려가 있다는 의견도 나왔다.
이에 지난달 29일 국회 보건복지위원회는 약사법 일부 개정 법률을 의결했다. 개정안의 핵심은 ‘창고’‘공장’‘팩토리’와 같이 의약품을 일반 공산품처럼 인식하게 하거나 환자가 의약품을 남용하게 할 우려가 있는 표현을 약국의 고유 명칭으로 사용하지 못하도록 법적으로 명시하는 것이다.
최종 입법까지는 절차가 남아있지만, 창고형 약국을 겨냥한 규제의 방향은 정해졌다. 촘촘한 규제가 이어질 경우 창고형 약국의 가격 우위가 줄면서 수요가 정체될 수 있다. 반면 규제가 일정 수준에서 정비되고 제도권에 편입된다면, 지금과는 또 다른 형태의 약국 소매 채널로 진화할 가능성도 있다. 한동안 비어 있던 자리를 채운 창고형 약국의 실험이 반짝 유행에 그칠지, 한국형 드럭스토어의 출발점이 될지 관심이 쏠리고 있다.
b.이슈
비크닉이 흘러가는 유행 속에서 의미 있는 이슈를 건져 올립니다. 사람들의 발길을 이끄는 매력적인 공간을 탐색하고, 시대와 호흡해 성장하는 브랜드와 기업을 조명합니다. 비즈니스적 관점은 물론, 나아가 삶의 운용에 있어 유의미한 ‘인사이트’를 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