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직연금 시장에서 요즘 주목할 변화는 양적 팽창이 아니라 질적 머니무브다. 연 1~2%대에 머물던 원리금보장 상품 자산이 빠르게 이동하고 있다. 그 중심에 상장지수펀드(ETF)가 있다. 퇴직연금 계좌 내 ETF 투자 잔액은 2025년 말 기준 약 49조원에 이른다. 3년 연속 100%대 증가율을 기록했다.
직장인들이 확정기여형 퇴직연금(DC)과 개인형 퇴직연금(IRP)에서 ETF로 몰려가는 이유는 명확하다. 실시간 매매로 시장 변화에 기민하게 대응하고, 저렴한 운용 보수로 장기 복리 효과를 극대화할 수 있다. 여기에 해외 지수 투자에서 발생하는 배당소득세를 연금 수령 시점까지 미뤄주는 ‘과세이연’ 혜택은 빼놓을 수 없는 매력이다. ‘방치형 자산’이었던 퇴직연금이 ETF 대중화를 계기로 ‘투자형 자산’으로 탈바꿈하고 있다.
문제는 그 속도가 만들어낸 수익률의 극단적 양극화다. 글로벌 증시와 성장 테마 ETF를 적극적으로 골라 담은 가입자는 두 자릿수 수익률의 단맛을 보았지만, 제도를 잘 모르거나 생업이 바빠 예금에 연금을 방치해 둔 가입자는 여전히 미미한 수익에 머문다. 실제로 가입자 간 수익률 격차가 20%포인트 가까이 벌어지는 현상은 단순한 투자 성과의 차이가 아니다. 노후 소득 불평등의 예고편에 가깝다.
리스크도 만만치 않다. 인덱스펀드의 창시자인 존 보글은 생전에 ETF를 “양의 탈을 쓴 늑대”라 불렀다. 실시간 매매의 편의성이 장기 투자라는 연금의 본질을 흐리고, 가입자를 단기 투기로 유혹해 결국 성과를 갉아먹는다는 경고였다. 영화 ‘빅쇼트’의 실제 주인공 마이클 버리는 패시브 자금의 맹목적 유입을 금융위기를 촉발한 부채담보부증권(CDO) 버블에 빗댔다. 그는 인덱스 열풍을 “출구는 그대로인데 관객만 늘어난 극장”으로 묘사했다. 하락장이 닥쳤을 때 거래량이 적은 자산에서 유동성 병목이 발생해 연금 계좌에 치명타를 입힐 수 있다는 지적이다. 펀더멘털 분석 없이 지수 상위 종목만 기계적으로 밀어 올리는 투자 방식이 은퇴를 앞둔 가입자의 노후 재원을 한순간에 난파시킬 수 있다는 경고다.
결국 퇴직연금 운용의 기본값으로 타깃데이트펀드(TDF)형 구조가 자리를 잡아야 한다. 젊을 때는 성장형 자산에 집중하고, 은퇴가 가까워질수록 채권 등 안전자산 비중을 자동으로 높여가는 생애주기형 설계다. 성장형 ETF가 화려한 공격수라면, 정교한 자산 배분과 변동성 관리는 노후를 지키는 든든한 수비수다. 공격수만으로는 시장의 폭풍을 이겨낼 수 없다. 탄탄한 수비 시스템이 뒷받침될 때 비로소 퇴직연금이 따뜻하고 안전한 노후 보장책이 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