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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준호의 혁신창업의 길] “수도권 일극체제 넘는 혁신생태계 거점 될 것”

중앙일보

2026.05.25 08:10 2026.05.25 1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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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기획 혁신창업의 길] R&D 패러독스 극복하자 〈105〉 포스텍
최준호 과학전문기자·논설위원

최준호 과학전문기자·논설위원

남방한계선. 애초 ‘식물의 생존이 가능한 위도상의 남쪽 한계선’을 뜻하는 말이다. 하지만, 수도권의 대학생이나 직장인들에겐 특정 지역 아래로 내려가기를 꺼린다는 뜻으로, 연구개발직은 판교, 기술직은 용인·평택을 마지노선으로 얘기한다. 같은 이유로 지방 기업인들에겐 인재채용과 투자유치의 어려움을 뜻하는 말로 흔히 쓰인다. 예외는 있다. 아니 예외가 생겨나고 있다. 대전 대덕특구가 대표적이지만, 경북 포항도 남방한계선 밖의 예외적 존재다. 공통점이 있다. 우수한 과학기술 특성화 대학과 연구소가 그것이다. 대덕은 KAIST와 정부·기업 연구소들이, 포항은 포스텍(포항공대)과 연구소(포항가속기연구소)에 포스코라는 대기업까지 있다. 이들 지역의 대학과 연구소의 연구가 기술이전이나 창업 같은 기술사업화로 이어지는 덕분이다.

포스텍, 수도권 밖 ‘혁신의 성’
교수·학생, R&D기반 창업 바람
코스닥 상장기업 성장 6개사
울산·대구와 협력, 역량 키워야

체인지업그라운드 로비층의 벽면 문구. 기술사업화의 정신을 담았다. 최준호 기자

체인지업그라운드 로비층의 벽면 문구. 기술사업화의 정신을 담았다. 최준호 기자

포항, 창업 품은 체인지업그라운드
지난 18일 오후 찾은 포스텍 캠퍼스는 ‘남방한계선’ 밖 ‘혁신의 성(城)’이었다. 포항역에서 내려 택시로 15분을 달리니 어느새 대학 건물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담장도 교문도 없어 학교의 경계를 알 수 없었다. 캠퍼스 한가운데 우뚝 선 ‘체인지업그라운드 포항’은 대학 연구개발(R&D) 기술사업화의 상징 같은 곳이다. 7층 규모, 연면적 2만8000㎡(약 8470평)의 건물에는 딥테크 스타트업 90여개사와 시제품을 만들 수 있는 ‘메이커 스페이스’ 시설, 포스텍 창업지원팀과 포항창조경제센터·팁스타운 등 창업지원시설이 입주해있다.

체인지업그라운드 포항 모습. [사진 포스텍]

체인지업그라운드 포항 모습. [사진 포스텍]

로비층에 들어서니 한쪽 벽면에 ‘TODAY’s RESEARCH, TOMORROW’s BUSINESS(오늘의 연구가 내일의 산업이 되다).’라는 문구가 크게 장식돼 있었다.

바이오브릭스의 대표 장진아 교수가 창업지원단과 회의를 하고 있다. 최준호 기자

바이오브릭스의 대표 장진아 교수가 창업지원단과 회의를 하고 있다. 최준호 기자

3층 회의실에서는 장진아(39) 포스텍 기계공학과 교수(융합대학원 의과학전공 겸임)가 대학 창업지원팀 직원들과 기술이전 협의를 하고 있었다. 장 교수는 교수 임용 7년 차이던 2022년 1월 스승인 조동우(68) 교수와 함께 바이오 딥테크 스타트업 바이오브릭스를 창업했다. 3D 바이오 프린팅 기술을 이용해 인공 장기를 제작하는 바이오잉크 등을 만들어내는 게 비즈니스 모델이다. 장기가 될 세포들이 진짜 인체 안에서처럼 숨 쉬고 자랄 수 있게 만드는 ‘탈세포화 조직 기반 바이오잉크’라는 원천기술이 바이오브릭스의 핵심 경쟁력이다. 아직 창업 5년 차에 불과하지만, 포스텍홀딩스와 하나벤처스 등으로부터 54억원의 투자금을 모았다. 올해 안으로 100억원 규모의 시리즈A 투자유치를 진행할 계획이다.

장 교수는 “학교에 있으면서 좋은 논문들을 많이 썼지만, 그것이 서랍 속이나 저널 속에만 머물러 있다면 사람들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걸 느꼈다”며 “랩(Lab) 안의 원천 기술을 진짜 세상 밖으로 꺼내 제품화하기 위해 창업이라는 바다로 뛰어들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기술사업화는 지도교수인 조동우 교수 연구실의 전통이기도 하다. 3D 바이오 프린팅 분야의 세계적 석학인 조 교수는 그간 연구실을 거쳐 간 제자들과 함께 코스닥 상장사인 티앤알바이오팹 등 5개의 딥테크 스타트업을 창업했다.

사업 모델을 설명하고 있는 블루카본 대표 황동수 교수. [사진 포스텍]

사업 모델을 설명하고 있는 블루카본 대표 황동수 교수. [사진 포스텍]

포스텍 환경공학부의 황동수(49) 교수도 캠퍼스 내 이름난 연쇄창업가다. 그는 2015년 자신의 전공인 홍합 접착 단백질 기술을 기반으로 네이처글루텍을 공동창업하면서 본격적인 기술사업화에 나섰다. 2017년에는 같이 연구하던 노상철 박사와 함께 친환경 나노셀룰로스 원료를 제조하는 에이엔폴리를 창업했다. 나노셀룰로스는 나노 단위로 쪼개진 섬유질을 말한다. 가볍지만, 강철보다 강하면서 100% 생분해된다. 이런 뛰어난 물성 덕분에 플라스틱 등 석유화학 대체물질로 떠오르고 있다. 에이엔폴리는 최근까지 총 190억원을 투자받았다. 회사는 지난 4월 체인지업그라운드를 떠나 포항 흥해읍 바이오특화단지에 3층 규모의 신사옥에 둥지를 틀고 있다.(본지 4월 28일 자 23면 참조) 황 교수는 2023년 9월에도 기후테크 스타트업 블루카본을 창업했다. 바다 미생물을 이용해 이산화탄소를 탄산칼슘으로 전환·격리하는 비즈니스 모델이다. 조개껍데기나, 산호, 흔히 보는 석회석의 주성분이 바로 탄산칼슘이다.

황 교수는 “인류의 재앙인 기후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대기 중 이산화탄소를 해양 생물공학 기술로 고체화해 지구의 탄소 시계를 늦추겠다는 사명을 가진 딥테크 기업”이라고 회사를 소개했다. 황 교수는 “대학, 특히 공과대가 사회문제 해결은 외면한 채 ‘논문을 위한 논문’만 양산하는 순환고리에 갇혀있다”며 “국민 혈세로 조성한 연구비를 지원받은 학자로서 사회적 부채를 갚기 위해 창업을 결심했다” 고 덧붙였다.

서울대·KAIST와 손잡은 학생창업
APGC랩이 주최한 대학생 연합 창업캠프. [사진 포스텍]

APGC랩이 주최한 대학생 연합 창업캠프. [사진 포스텍]

포스텍은 학생창업 열기도 만만치 않다. 포스텍 IT융합공학과 대학원생들이 2018년 공동창업한 폴라리스쓰리디는 자율주행 기술 기반으로 ‘자율로봇제어 플랫폼’을 만드는 스타트업이다. 2024년 현대기술투자 등으로부터 150억원 상당의 시리즈B 투자 유치에 성공하는 등 누적 투자액이 210억원에 달한다. 포스텍의 창업 문화 확산과 지원을 주도하고 있는 학생단체 ‘APGC랩’의 김희서 회장(컴퓨터공학과 2학년)은 “과거 공학 전공자들의 엘리트 코스가 대학원 진학이나 삼성전자, SK하이닉스 등 대기업 입사였지만 최근 분위기는 크게 달라지고 있다” 며 “학생들 사이에서 창업은 더 이상 무모하거나 특별한 이들만의 전유물이 아니라, 스스로 길을 개척해 나가는 가장 힙(hip)하고 멋진 도전으로 인정받고 있다”고 말했다.

실제로 APGC랩이 주관하는 창업행사에는 매번 적지않은 학생들이 몰려 성황을 이룬다. 지난달 말 체인지업그라운드에서 열린 ‘교내 아이디어톤’에는 하루 만에 팀 빌딩부터 최종 피칭까지 마치는 빡빡한 일정임에도 11개 팀, 28명의 학생이 참여해 기술 아이디어를 겨뤘다. 방학 기간을 이용해 서울대·KAIST·연세대·고려대 등 주요 5개 대학 창업 학생들과 서울에서 2박 3일간 끝장 토론을 벌이는 ‘스타트업 48’ 아이디어톤도 매년 열린다. 또 학부생과 동문 창업 선배들이 수백명씩 모여 창업 생태계를 공유하는 ‘네트워킹 데이’도 있다.

포스텍 창업지원팀에 따르면 교원 창업기업은 114개(1995년 이후), 이들이 최근 3개년간 투자를 유치한 실적은 348억원이 넘는다. 학생창업 기업도 38개(2017년 이후), 최근 3개년도 투자유치 실적은 235억원에 달한다. 이중 제넥신·티앤알바이오랩·카페24·압타머사이언스·뉴로메카·아우토크립트 등 6개 기업은 코스닥 상장사로 성장했다.

김영옥 기자

김영옥 기자

박영섭 포스텍 창업지원팀 과장은 “포스텍은 승진·재임용, 그리고 업적평가 때 기술이전과 창업 등 산학협력 실적으로 연구분야를 평가하는 ‘산학협력 친화형 교원인사제도’를 시행하고 있다”며 “2019년에는 학생창업 전담부서까지 새로 만들어 학내 창업을 격려하고 있다”고 말했다.

아직 포항의 한계도 있다. 창업 후 회사 규모가 커지면, 인재 채용의 어려움 때문에 포항을 떠나 수도권으로 이사하는 사례가 적지 않다. 포항은 30년 가까이 인구 50만 대도시를 지켜왔으나, 2022년 50만 명 아래로 떨어졌고, 지난해 말엔 48만 8707명을 기록하는 등 인구감소세가 지속하고 있다.

포항은 R&D 기술사업화의 ‘원조’
김성근 포스텍 총장은 그래도 긍정적이다. 김 총장은 “포항이 지방에 있다는 사실에 구애받을 이유가 없다”며“포스텍·포스코·포항시, 이 세 축이 긴밀하게 맞물리면 포항은 기업과 자본, 젊은 인재가 자연스럽게 유입되는 과학기술도시로 충분히 도약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또 “울산의 UNIST, 대구의 DGIST와 협력을 통해 영남권 전체의 혁신 역량을 함께 키워나간다면 수도권 일극 체제를 넘어서는 또 하나의 국가적 혁신 거점이 만들어질 수 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실은 포항이야말로 R&D 기술사업화와 지역경제 활성화의 ‘원조(元祖)’과 같은 곳이다. 의류·가발·신발 등 경공업이 전부였던 1960년대, 해외 유치과학자들이 주축이 된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의 기획과 연구가 있었고, 인구 6만 명의 작은 어촌에 불과했던 지역에 포항제철이 건설돼 중화학공업의 토대를 세우고 지역경제의 큰 축을 만들어낼 수 있었다. 포항이 ‘기술사업화의 고전’을 넘어, 21세기 대한민국 혁신창업 생태계 속 지역 맹주로 자리 잡을 수 있을까.




최준호([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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