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시흥에서 산업용 장비를 만드는 중소기업 대표 김모(50)씨의 속은 타들어간다. 베어링과 고무 등 부품을 수입하는데 고환율 여파로 손실 규모가 커졌기 때문이다. 김씨는 “두 달 전에 수입 비용을 줄이려고 수입처를 중국으로 돌렸는데 원화가 위안화보다 더 떨어져 2억원 가까이 손실이 났다”며 “1500원대 환율이 이어지면 버티기 쉽지 않을 거 같다”고 말했다.
정근영 디자이너
원화의 실질가치가 17년 1개월 만에 가장 낮은 수준으로 떨어진 영향이다. 25일 국제결제은행(BIS)이 산출한 지난달 원화의 실질실효환율(2020년=100) 지수는 85.06이다. 세계 금융위기 직후인 2009년 3월(79.31) 이후 가장 낮다. 실질실효환율은 물가와 교역상대국 통화가치를 반영해 한 나라 통화의 대외 구매력(실질가치)을 보여주는 지표다. 지수가 낮을수록 해당 통화의 실질가치가 약하다는 의미다. BIS가 발표하는 64개국 가운데 한국보다 낮은 국가는 일본(65.7)뿐이다.
이달 들어선 환율 1500원 시대가 다시 열렸다. 서울 외환시장에서 원-달러환율은 지난 22일 주간 종가 기준 전날보다 11.3원 오른(원화가치 하락) 1517.2원에 마감했다. 6거래일 연속 1500원대를 웃돌더니 1520원 선 턱밑까지 치솟았다.
김영옥 기자
달러 강세만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현상이다. 올해 1분기 해외에서 벌어들인 경상수지 흑자는 737억8000만 달러(약 112조원)로 1년 새 4배 가까이 늘었다. 코스피도 장중 처음으로 8000선 고지를 밟았다. 전통적인 통화 강세 조건을 갖췄지만, 원화는 오히려 아시아 통화 가운데 최약체로 밀려났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연초 이후 지난 22일까지 한국 원화가치는 달러 대비 5.2% 내렸다. 하락률로는 40개국 중 6위다. 필리핀 페소(-4.5%)와 태국 바트(-3.5%), 대만 달러(-0.8%), 베트남 동(-0.2%)보다 낙폭이 더 컸다. 특히 같은 기간 중국 역외 위안화(2.5%)와 말레이시아 링깃(2.3%)은 오히려 달러 대비 통화가치가 상승했다.
가장 큰 원인은 100조원 상당의 외국인 자금의 이탈이다. 외국인이 한국 주식을 판 뒤 달러로 환전해 빠져나가면서 환율 상승 압력을 키우고 있다.
지난 24일 김용범 대통령실 정책실장은 페이스북에 “고금리·고물가·고환율은 한국 경제가 새로운 차원으로 도약하는 과정에서 불가피하게 수반되는 성공의 비용이다. 위기의 전조가 아니라 도약의 마찰음”이라고 적었다. 대표적 사례로 환율을 꼽았다. “올해 코스피가 70% 이상 급등하면서 외국인이 막대한 평가차익 일부를 회수하는 과정에서 매도세가 나타났고, 환전 수요가 환율을 밀어 올렸다”고 평가했다. 이어 “현재의 원화 약세는 외환위기처럼 외화 부족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다”며 “한국 경제의 취약성이 아니라 성공이 만들어낸 역설적 현상”이라고 했다. 반도체 수출 호조에 따른 강한 성장세와 초과 세수, 주식 등 자산가격 상승이 이런 자신감을 뒷받침한다.
실제 지난해 개인과 기관의 해외투자 확대가 원화 약세의 배경이었다면 올해는 주체가 외국인 투자자로 바뀌었다. 공통점은 경상수지 흑자로 벌어들인 달러가 자본유출로 상당 부분 상쇄되고 있다는 점이다. 한국거래소에 따르면 외국인은 이달 들어 22일까지 40조원 넘게 코스피 주식을 팔아치웠다(순매도). 연초 이후 누적 순매도액은 93조2235억원으로 1년 전(13조8112억원)의 6.7배에 달한다.
벌어들인 달러를 환전하지 않고 그대로 해외에 두려는 기업의 수요도 한몫한다. 한 국책연구원 관계자는 “공장 건설 등 해외 투자 목적인지 환 손실을 방어할 목적인지 알 수 없으나 기업들의 이런 선택 또한 고환율을 지탱하는 한 요인”이라고 진단했다.
외환시장 시각도 예전과 다르다. 한 외환 딜러는 “예전에야 환율이 1500원까지 오르면 정부가 무슨 방법이든 쓸 테니 방향 전환 쪽에 베팅했겠지만, 요즘은 눈높이가 훨씬 위쪽에 있는 것 같다. 1600~1700원을 생각하는 투자자가 많으니 달러를 보유하려는 수요 또한 여전히 많은 것 아니겠냐”고 반문했다.
김영옥 기자
문제는 앞으로다. 대외 여건이 녹록지 않다. 중동 사태가 두 달 넘게 이어지면서 고유가 충격이 본격화하고 있다. 한국은 원유 수입의 중동 의존도가 높은 만큼 유가 상승은 수입물가를 압박하고 원화 약세 요인으로 작용한다. 여기에 미국의 통화 긴축 기조도 변수다. 인플레이션(물가 상승) 우려가 커질 경우 미국 연방준비제도(Fed)가 인상으로 금리 경로를 바꿀 수 있기 때문이다. 이때 시장 금리와 달러 강세가 이어지면 전 세계에 퍼져있는 자금이 미국으로 더 쏠릴 수 있다.
정부도 대응 수위를 높이고 있다. 환율 변동성을 완화할 목적으로 미국에 통화스와프를 제안한 데 이어 원-달러 환율이 1520원까지 치솟은 22일엔 “환율 움직임이 과도하다”며 구두개입에도 나섰다.
하지만 원화가치를 끌어내리는 주요인으로 저성장·고령화도 꼽히는데 당장 해결이 어려운 문제다. 최근 경기와 증시 회복이 반도체 업황에 집중돼 경제 전반의 체력 개선으로 보기 어렵다는 분석도 나온다. 박형중 우리은행 이코노미스트는 “달러 자금이 국내에 머물고 반도체 외 산업 투자될 환경이 마련돼야 원화가치도 올라간다”며 “환율 1500원 시대가 고착화하면 경제 전반의 부담이 커질 수 있다”고 강조했다.
중동 전쟁 여파로 유가가 출렁이는 가운데 수입 물가도 점진적인 상승세다. 장바구니 물가 상승 우려 또한 점증하는 상황이다. 물가 상승에 따른 부담은 저소득층일수록 더 크다. 가뜩이나 심화하는 양극화를 더 자극하는 요인으로 작동할 수 있다. 이런 가운데 하반기 기준금리까지 오른다면 서민의 삶은 더 팍팍해질 수밖에 없다. 고금리 장기화는 중소기업과 취약 가계 등에 직격탄이다.
허준영 서강대 경제학과 교수도 “한 달, 3개월, 6개월 단위로 뒤돌아보면 상승 하락을 반복하며 조금씩 그 수준을 높여가는 모습인데 꽤 긴 시간 동안 고환율에 대한 내성이 생긴 것”이라며 “가랑비에 옷이 젖듯 충격이 쌓여가고 있는데 당장은 아니라도 환율로 고통받는 계층이 많아지면 예기치 못한 부작용이 돌출될 수 있다는 점을 생각해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