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고닫기

전쟁으로 반목하기에는, 광활한 우주 속 이토록 작은 존재들

중앙일보

2026.05.25 23:40

  • 글자크기
  • 인쇄
  • 공유
글자 크기 조절
기사 공유
서귀포 포도뮤지엄에서 8월까지 열리는 '우리 이토록 작은 존재들'에 출품된 라이자 루의 '시큐리티 펜스'. 사진 포도뮤지엄

서귀포 포도뮤지엄에서 8월까지 열리는 '우리 이토록 작은 존재들'에 출품된 라이자 루의 '시큐리티 펜스'. 사진 포도뮤지엄

가시철망 위에 촘촘히 붙은 유리구슬이 반짝인다. 미국 미술가 라이자 루는 남아프리카공화국에 가 인종차별을 당한 줄루족 여성 20명과 협업했다. 높이 3.3m 철조망에 비즈를 한 알씩 핀셋으로 붙였다. 꼬박 1년을 매달렸다. 인종분리정책의 상징이던 철조망이 반짝이는 미술품이 됐고, 여성들의 트라우마를 치유하는 한편 안전한 일자리가 됐다. 제주 서귀포 포도뮤지엄에서 8월 8일까지 열리는 ‘우리 이토록 작은 존재들’에서 만나는 작품 ‘시큐리티 펜스(Security Fence)’다.

가까이서 본 '시큐리티 펜스'. 철조망 울타리를 비즈로 감았다. 서귀포=권근영 기자

가까이서 본 '시큐리티 펜스'. 철조망 울타리를 비즈로 감았다. 서귀포=권근영 기자

『코스모스』를 쓴 천문학자 칼 세이건은 “우리는 별의 먼지로 만들어졌다”고 통찰한 바 있다. 전시 제목은 그의 딸 샤샤 세이건의 책 『우리, 이토록 작은 존재들을 위하여』에서 따왔다. 전시는 ‘광활한 우주 속 미약한 존재인 우리는 왜 끊임없이 갈등하는가?’라는 질문에서 출발했다. 사라 제, 제니 홀저, 송동, 이완 등 국내외 13명의 작품이 나왔다.

가까이서 본 모나 하툼의 '남은 것들'. 총 1.6t 콘크리트를 매달았다. 서귀포=권근영 기자

가까이서 본 모나 하툼의 '남은 것들'. 총 1.6t 콘크리트를 매달았다. 서귀포=권근영 기자

전시장 초입에는 총 1.6t에 달하는 콘크리트 덩어리들이 공중에 매달려있다. 포격으로 종잇장처럼 부서진 뉴스 속 콘크리트 건물의 잔해를 떠올리게 하는 이 장면은 모나 하툼의 ‘남은 것들’. 하툼은 1952년 레바논에서 태어났다. 부모는 팔레스타인에서 쫓겨난 기독교 난민. 1975년 런던을 방문한 하툼은 레바논 내전이 발발하면서 고국에 돌아갈 수 없게 됐다. 10년 넘게 가족과 강제 분리됐던 경험이 그의 작품 세계를 형성한다.

'작은 창의 일출' 연작이 전시된 포도뮤지엄 2층. 한쪽 면에 경첩을 붙인 액자를 들추면 그림에 영감을 준 그날의 신문 기사가 나온다. 서귀포=권근영 기자

'작은 창의 일출' 연작이 전시된 포도뮤지엄 2층. 한쪽 면에 경첩을 붙인 액자를 들추면 그림에 영감을 준 그날의 신문 기사가 나온다. 서귀포=권근영 기자

미국 브루클린에 사는 일본 화가 쇼 시부야는 매일 아침 옥상에 올라가 뉴욕타임스를 읽는다. 신문 1면에 그날의 하늘을 그리고, 가장 인상적인 기사를 골라 뒤에 붙인다. 코로나 19가 시작되던 2020년부터 반복하는 일상이다. 세계 곳곳의 전쟁과 참사를 비롯해 인간사의 크고 작은 고통을 신문 기사로 마주한 뒤 작가가 치르는 추모 의식이다. 평온한 하늘 그림 액자를 젖히면 그날의 참사와 재난 기사가 나온다. 전시장의 36점 중에는 2024년 12월 29일 자도 있다. 흐린 하늘 그림 뒷면의 기사는 무안 공항 참사다.

이완의 '고유시'(2017). 사진 포도뮤지엄

이완의 '고유시'(2017). 사진 포도뮤지엄

2017년 베니스 비엔날레 한국관 대표 작가로 나섰던 이완의 ‘고유시’는 복도 양 벽면을 476개의 하얀 시계로 채운 설치다. 저마다 다른 리듬으로 째깍거리는 시계마다 이름, 출생연도, 직업, 국적이 적혀 있다. 작가는 “사람들은 과연 하루 몇 시간을 일해야 한 끼 식사를 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에서 출발, 저마다 다른 시간의 속도를 시계로 구현했다.

2021년 4월 개관한 서귀포 포도뮤지엄. 사진 포도뮤지엄

2021년 4월 개관한 서귀포 포도뮤지엄. 사진 포도뮤지엄

포도뮤지엄은 SK 자회사 휘찬이 ‘다빈치박물관’으로 운영하던 전시장을 리모델링해 2021년 개관했다. 그동안 ‘너와 내가 만든 세상’‘그러나 우리가 사랑으로’‘어쩌면 아름다운 날들’ 등 감성을 두드리는 기획전을 열었다. 개관 5주년을 맞아 앞으로 3년간 뉴욕 메트로폴리탄미술관의 ‘우먼 앤 더 크리티컬 아이(Women & the Critical Eye)’를 후원할 예정이다. 미술계에서 상대적으로 조명받지 못했던 여성 예술가와 전문가, 여성 소장가의 역할을 재조명하는 행사로 지난달 15일 열렸다. 9월에는 미국 최대 규모 아시아 미술관인 샌프란시스코 아시아미술관에서 열리는 한국 단색화 거장 하종현의 미국 첫 회고전을 지원한다.






권근영([email protected])

많이 본 뉴스

      실시간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