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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숙인의 조선가족실록] 손·이씨 3대에 걸친 애민정신, 씨족 마을에 고스란히

중앙일보

2026.05.28 08:12 2026.05.28 1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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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문화 유산 양동마을과 손중돈 가족
이숙인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이숙인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마을 전체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경주 양동은 한국을 대표하는 전통 마을이다. 2010년 안동 하회마을과 함께 가치와 역사를 품은 세계적 명소가 된 것이다. 양동은 국보와 보물을 비롯 지정문화재만 25점을 보유하고 있고, 무첨당(無忝堂)과 관가정(觀稼亭) 등 고가옥이 잘 보존되어 있어 생활하는 박물관으로 불린다. 주민 대다수가 경주 손씨 아니면 여주 이씨라 한다. 자연 촌락에서 시작되었을 이 마을이 500년이 넘도록 동족촌의 형태를 유지하며 의미를 재생산해 온 힘은 무엇인가. 시작이 화려해도 수백 년 지속성을 가진 마을로 남아있기는 드문 일이다. 이 씨족 공동체의 시작은 어디인가.

장가 들며 처가 거주지 입향한 손소
성주 목사 마치자 백성이 연장 상소

아버지의 능력·도덕성 이은 손중돈
“대사헌 시절 뇌물 안 통해” 칭송

외손 이언적, ‘분노에 신중’ 가훈 실천
이황 등 조선 성리학 정립에 역할

양동마을 전경. [사진 한국학중앙연구원]

양동마을 전경. [사진 한국학중앙연구원]

양동이라 하면 손소(孫昭·1433~1484)와 그의 아들 손중돈(孫仲墩·1463~1529) 그리고 외손 이언적(李彦迪·1491~1553)이라는 15~16세기에 활약한 걸출한 인물들을 떠올리게 된다. 손소의 친손과 외손이 각각의 부계 집단을 이루어 왔다. 아들의 후손과 딸의 후손이 서로 경쟁하고 협력하며 같은 공간에서 500년 이상을 함께해 온 것이다. 이는 매우 특별한 사례로 처가(妻家)에 입향한 사위에 의해 기존의 성씨가 대체되는 대부분의 마을과는 차별화된다 하겠다. 양동 역사의 정체성을 이루는 세 인물이 남긴 유산은 조금씩 다르지만 서로 연결되어 있다.

조선 전기에는 처가쪽에 거주지
먼저 손소가 양동에 입향한 것은 지금으로부터 570년 전(세조 3) 류복하(柳復河)의 무남독녀에게 장가를 들면서이다. 류복하 또한 양동마을로 장가온 사람인데, 조선전기에는 처가 쪽에 거주지를 정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즉 시집을 가는 것이 아니라 장가를 오는 것이다. 손소는 아버지의 처가이자 자신의 외가인 청송 안덕에서 나고 자라 혼인과 함께 양동으로 들어온다. 하지만 그의 자녀 5남3녀는 장남 손백돈이 그 처향으로 옮겨가고, 손중돈 이하의 자녀들은 형편에 따라 거주지가 정해진 것으로 보인다. 특히 둘째 아들 중돈이 양동에 남아 손씨 부계 집단을 계승했고, 사위 이번(李蕃)이 양동에 입향해 여주 이씨의 계보를 정착시켰다.

양동마을 전경. [사진 이숙인]

양동마을 전경. [사진 이숙인]

그러면 양동에 처음 도착한 손소는 누구인가. 그가 남긴 유산은 혈연적 선조 그 이상의 것이라 후손들은 불천위(不遷位) 제사를 통해 그와 영원한 만남을 이어가고 있다. 손소는 아버지 손사성(孫士晟)의 뒤를 이어 세조 5년 문과 급제로 문신의 반열에 오른다. 그는 주로 국가를 대변하는 문장을 짓거나 경연의 강의를 주도하는 등 학술 부문을 담당하며 세조의 신임을 받았다. 35세 때 함경도에서 일어난 이시애의 반란으로 그의 신분에 큰 변화가 생긴다. 당시 손소는 장군의 종사관으로 출전하여 난을 진압한 공으로 적개공신에 봉해지면서 부와 명예를 동시에 얻게 되었다. 왕은 말한다.

“그대 손소는 이미 불세(不世)의 성대한 공적을 세웠으니, 황하가 변해 좁은 띠처럼 되고 태산이 마모되어 숫돌이 되도록 큰 복과 공적을 영원히 보존하라.”(세조 13년 11월 2일)

그런데 손소는 공신으로서의 특혜와 권력을 누리기보다 자기 검속을 더 철저히 하는 쪽으로 선회한다. 이후의 행보를 보면 중앙의 요직보다 외직을 자처하여 성주·안동·진주의 지방관으로 나간다. 성주 사람들은 중앙 정부에 이런 상언(上言)을 올렸다.

“성주 목사 손소는 백성 보호하기를 자식과 같이 하여 고을 전부가 굶주림을 면하게 되었습니다. 이제 또 흉년이 들었는데 목사가 마음을 다하여 구휼하니 백성들의 큰 의지가 됩니다. 목사의 만기가 되어 체임된다 하니 그대로 있게 해 주소서.”(성종 2년 11월 26일)

함경도의 반란 진압에 공을 세워 적개공신에 봉해진 손소 영정(15세기 제작, 보물 1216호). [사진 한국학중앙연구원]

함경도의 반란 진압에 공을 세워 적개공신에 봉해진 손소 영정(15세기 제작, 보물 1216호). [사진 한국학중앙연구원]

넘치는 것은 덕, 모자란 것은 나이
손소를 말하는 사람들은 한결같이 유능한 경세가이자 청렴과 도덕성을 갖춘 인물이라고 하였다. 그런 손소가 52세의 나이로 급서하자 급제 동방(同榜)이자 30년 친구 김종직(1431~1492)은 묘갈명에 이렇게 새겼다.

“넘치는 것은 덕(德)이요 모자란 것은 나이로다.”(『점필재문집』)

손소의 경세가로의 능력과 곧고 청렴한 덕성은 아들 손중돈에도 그대로 계승된다. 손중돈 역시 조부와 부친이 걸었던 길을 가는데, 27세(성종 14년)로 문과에 급제하며 관계(官界)에 입문한다. 영남사림의 영수 김종직의 문하에서 쌓은 공부를 펼칠 기회를 얻은 것이다. 손중돈은 성리학적 소양이 매우 깊었고 그런 소양을 관직이라는 매개를 통해 끊임없이 국정운영에 반영하려 했다(김학수, ‘16세기 사림파 관료 손중돈의 경세관과 학풍’).

그가 중앙 부처의 관직에 있을 때 제안하거나 상소한 자료를 보면 대개 민본(民本), 민생(民生)에 관한 것이었다.

“백성은 나라의 근본이며 백성들은 먹을 것을 하늘로 여긴다고 합니다. 백성들이 굶주림에 허덕이게 된다면 임금은 누구와 편안할 수 있겠습니까.”(중종 20년 11월 18일)

손중돈 초상. [사진 국립중앙박물관]

손중돈 초상. [사진 국립중앙박물관]

그래서인지 손중돈은 외직으로 나가 목민관의 꿈을 펼쳐보기를 염원한다. 그는 44세에 상주 목사에 부임해 3년여 목민의 도를 실천하며 선정을 베풀었다. 상주 백성들은 그의 노고에 생사당(生祠堂·산 사람을 기리는 사당)을 지어 응답했다. 중종 10년, 나이 53세의 그는 관료로서 최상의 명예인 청백리에 녹선된다. 부자가 함께 거론되는 경우가 많았는데, 그들에 대한 세평은 이러했다.

“그 아버지 손소가 수령으로 치행(治行)이 으뜸이라 세상의 칭송이 자자했는데, 그 아들이 그대로 계승했으니 가문의 명예가 빛나는구나. 손중돈은 늘 ‘우리 아버지의 청렴하고 개결함은 나로서는 미치지 못한다.’ 하였다.”(중종 4년 2월 7일)

손중돈이 67세의 나이로 죽자 생전의 행적이 회자되었다.

“그의 집안은 대대로 청검(淸儉)을 지켜 시종 변치 않았다. 직무 이외의 일에 방문하는 것을 삼갔고 관아의 일이 파하면 곧바로 제집으로 돌아갔다. 정병(政柄, 대사헌)을 잡았어도 뇌물이 통하지 않으므로 문정(門庭)이 고요했다.”(‘손중돈졸기’)

손중돈이 지은 고가옥인 관가정. [사진 문화재청]

손중돈이 지은 고가옥인 관가정. [사진 문화재청]

고급 관료로서 나라의 재산을 지키고 백성의 민생에 고심한 손중돈은 사실 큰 재산을 소유한 것으로 나온다. ‘손소적개공신교서’에 의하면 아버지 손소가 하사받은 재산은 노비 23구, 밭 100결(30만 평 규모), 은 25냥, 말 1필 등이다. 그는 양동 처가로부터 받은 것에 더해 더 단단한 물질적 자원을 갖추게 된 것이다. 이것은 손소의 사후 자녀들에게 골고루 상속되었다. 손소가 죽은 지 26년 후 부인 류씨가 사망하는데, 그의 자녀 5남 2녀(장녀는 사망)가 유루분(遺漏分·본 상속을 하고 남은 부분) 분재를 단행한다. 노비 134구와 논밭은 대략 15만 평이다. 유루분만 해도 지역의 유력 가문이 가질 수 있는 규모다. 이들은 성별 나이 구분 없이 균분(均分)하되 장남 손백돈에게 봉사조 몫으로 더 갔다. 말하자면 손소가 남긴 부와 명예는 친손과 외손의 사회적 성장을 돕는 밑거름이 되었다.

이언적은 양동 손소의 집 서백당(書百堂)에서 태어났다. 이 집에서 28년 전 외숙 손중돈이 태어났다. 10살 때 아버지를 여읜 이언적은 외숙 손중돈의 임지(任地)를 따라다니며 각별한 양육과 가르침을 받는다.

“외숙만 의탁하니 특별하신 그 보살핌 쓰다듬고 어루만져 부드럽고 간절했네. 가르치고 키우기를 친자식과 다름없게 하시니 사람의 도리 대략 알게 된 것은 외숙이 주심이라.”(『회재집』, ‘외숙에게 올리는 제문’)
손소가 지은 서백당. [사진 한국학중앙연구원]

손소가 지은 서백당. [사진 한국학중앙연구원]


외조·외숙과 달리 저서 남긴 이언적
이언적 또한 외조와 외숙처럼 문과 급제로 내외직의 여러 벼슬을 거친다. 하지만 정치적인 부침을 겪으며 57세의 나이로 평안도 강계 유배길에 오르고, 그곳에서 63세로 생을 마칠 때까지 학문에 전념하며 중요한 저술들을 남겼다. 외조 손소와 외숙 손중돈이 저술을 남기지 않은 것과 비교된다. 그런데 치국의 기본 원리를 개진한 이언적의 ‘진수팔규(進修八規)’에는 20여 년 전 손중돈이 나라를 걱정하며 올린 국정 현안에 대한 의견이 고스란히 녹아들었다. 조카는 외숙 손중돈의 문제의식을 더 심화시키고 발전시킨 것이다. 과거에 안동부사로 나가게 된 이언적이 외숙에게 치민(治民)의 도를 물었다. 손중돈은 ‘신노(愼怒)’ 두 글자로 답한다. 분노를 신중히 하라는 것이다. 이언적은 두 글자를 고이 간직하고 실천한다. 이들의 경세사상은 가족 세미나를 거친 공동 작품인 셈이다. 이언적은 퇴계 이황의 존경받는 선배이자 조선 성리학의 정립에 선구적인 역할을 한 동방오현(東方五賢)의 한 사람이다.

양동마을이 세계문화 유산에 오른 것은 크고 위대한 무언가가 있어서가 아니다. 일상 속에서 선조의 삶과 지혜를 기억하고 실천해 온 후손들의 역사 그 자체가 문화적 자원이 아닐까.

이숙인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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