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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솝부터 디올까지, 브랜드가 조명으로 공간을 점령하는 법 [비크닉]

중앙일보

2026.05.28 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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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막 내린 세계 최대 디자인·가구 행사, 2026 밀라노 가구 박람회. 이제 이곳에서 패션·뷰티 브랜드가 가구나 리빙 오브제를 선보이는 일은 낯설지 않다. 하지만 올해 유독 눈에 띈 건 소파나 테이블보다 ‘빛’이었다. 많은 브랜드가 앞다퉈 조명을 공개했다.

화장품 아닌 조명 낸 뷰티 브랜드
핸드 크림으로 유명한 브랜드 이솝은 지난달 21일 조명 컬렉션 ‘아포세(Aposē)’를 발표했다. 일회성 오브제가 아니라 판매까지 하는 본격 조명 상품이다. 브랜드의 시그너처인 핸드밤 튜브에서 영감을 받은 이 조명은 이솝 내부 디자인팀의 작품으로, 이솝 특유의 정돈된 형태와 분위기를 구현했다. 제작은 장인의 수공의 방식으로 진행됐으며, 생산은 이탈리아 조명 브랜드 플로스(Flos)가 담당했다. 유리는 베네치아 인근 유리 공방에서, 황동 베이스는 독일 주물 공방에서 제작할만큼 공을 들였다.

이솝의 첫 조명인 아포세는 유리와 황동 소재로 만들어졌으며 테이블 램프, 펜던트 조명, 플로어 램프 형태로 제작됐다. 사진 이솝

이솝의 첫 조명인 아포세는 유리와 황동 소재로 만들어졌으며 테이블 램프, 펜던트 조명, 플로어 램프 형태로 제작됐다. 사진 이솝


아포세는 이솝 매장의 감각을 집 안으로 옮겨오는 프로젝트에 가깝다. 전 세계 어느 이솝 매장이든 공간에 들어서면 특유의 차분한 분위기를 느낄 수 있는데, 이를 결정짓는 낮은 색온도(2400K)의 빛을 그대로 구현했다. 소비자가 집에서도 브랜드 특유의 무드를 경험할 수 있도록 설계한 것이다. 향이 브랜드의 기억을 남기듯, 빛 역시 브랜드 경험의 일부가 된다.

브랜드 철학을 번역하는 오브제
이세이 미야케 역시 조명을 통해 브랜드의 철학을 입체적으로 드러냈다. 지난해 밀라노 가구 박람회에서 공개했던 ‘TYPE-XIII 아뜰리에 오이 프로젝트’를 발전시켜, 올해는 실제 판매까지 이어갔다.

이 프로젝트는 “패션 브랜드가 조명을 만들었다”는 수준에 머물지 않는다. 오히려 이세이 미야케가 수십 년간 발전시켜온 의류 제작 기술 자체를 조명의 구조로 확장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세계적인 디자인 스튜디오 아틀리에 오이(Atelier Oï)는 브랜드의 상징인 주름진 ‘플리츠’ 기술을 조명 설계에 적용했다.
이세이 미야케는 의류의 영역을 넘어 단 하나의 천으로 조명 제품을 디자인할 수 있는 가능성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사진 이세이 미야케

이세이 미야케는 의류의 영역을 넘어 단 하나의 천으로 조명 제품을 디자인할 수 있는 가능성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사진 이세이 미야케


대표 제품인 휴대용 무선 조명 ‘O 시리즈’를 보면, 평평한 원단에 열을 가해 입체적인 주름을 만드는 이세이 미야케 특유의 제작 방식이 그대로 드러난다. 일반적인 패브릭 조명처럼 천이 표면을 감싸는 것이 아니라, 주름 잡힌 원단 자체가 형태를 지탱하는 구조체로 기능한다. 이는 ‘한 조각의 천(A Piece Of Cloth)’이라는 브랜드 철학을 조명이라는 매체로 다시 번역한 결과이기도 하다.

라이프스타일 전시장이 된 가구 박람회
이런 흐름은 최근 밀라노 디자인 위크의 변화와도 맞닿아 있다. 과거 밀라노 가구 박람회가 산업 중심의 가구 전시였다면, 최근에는 패션·뷰티·자동차·테크 브랜드까지 참여하는 거대한 라이프스타일 플랫폼으로 확장하고 있다. 단순히 제품을 전시하는 것이 아니라, 브랜드의 세계관과 감각을 공간 경험으로 보여주는 방향으로 진화한 것이다.
현지 작업실에 머무르며 이탈리아 장인들의 가죽 공예 노하우를 경험한 이광호 작가는 조명 라이트풀을 제작했다. 사진 보테가 베네타

현지 작업실에 머무르며 이탈리아 장인들의 가죽 공예 노하우를 경험한 이광호 작가는 조명 라이트풀을 제작했다. 사진 보테가 베네타


조명은 이런 흐름에 가장 적합한 매체다. 공간의 분위기를 가장 즉각적으로 바꾸면서도, 비교적 작은 규모로 브랜드의 미학을 압축해 전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 올해 밀라노에서는 보테가 베네타와 디올이 조명을 통해 브랜드의 정체성을 공간 오브제로 확장하는 모습을 보였다.

보테가 베네타는 한국 작가 이광호와 협업한 조명 설치 작품 ‘라이트 풀(Light Pool)’을 공개했다. 브랜드의 상징인 가죽 짜임 ‘인트레치아토’를 공간 구조물로 재해석한 작업이다. 천장에 매달린 거대한 짜임 구조 사이로 빛과 그림자가 교차하며, 브랜드 특유의 조용한 럭셔리를 공간 전체로 확장했다.

디올은 프랑스 디자이너 노에 뒤쇼푸르 로랑스와 함께 ‘코롤 램프’를 공개했다. 코롤은 1947년 크리스찬 디올이 발표한 상징적인 실루엣으로, 잘록한 허리와 아래로 풍성하게 퍼지는 형태가 특징이다. 이번 조명 역시 그 곡선미를 그대로 이어받았다. 특히 무라노 유리 장인과 일본 교토의 대나무 공예 장인이 함께 제작에 참여하며, 패션 하우스의 역사를 공예로 승화했다.
디올이 노에 뒤쇼푸르 로랑스 디자이너와 협업해 선보인 코롤 램프. 램프의 곡선은 코롤 스커트의 시그니처 라인에서 영감 받았다. 사진 디올 홈페이지

디올이 노에 뒤쇼푸르 로랑스 디자이너와 협업해 선보인 코롤 램프. 램프의 곡선은 코롤 스커트의 시그니처 라인에서 영감 받았다. 사진 디올 홈페이지


소장할 수 있는 브랜드의 ‘유물’
패션이 옷을 통해 사람의 인상을 바꾼다면, 조명은 공간의 인상을 바꾼다. 같은 공간이라도 어떤 빛을 쓰느냐에 따라 분위기와 감정은 완전히 달라진다. 최근 브랜드들이 플래그십 스토어와 카페, 전시 등 공간 경험에 집중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소비자는 이제 제품뿐 아니라 브랜드가 설계한 감각과 분위기까지 소비한다. 그리고 조명은 그 경험의 분위기와 느낌을 완성하는 핵심 장치다.

동시에 조명은 브랜드 입장에서 가장 현실적인 카테고리이기도 하다. 소파나 대형 가구는 가격 부담이 크고 공간과의 조화도 중요하지만, 조명은 비교적 작은 오브제로 소비자의 일상 공간 안에 자연스럽게 들어갈 수 있다. 브랜드 철학을 가장 부담 없이 경험하게 하는 입문형 오브제인 셈이다.
이솝의 조명은 브랜드의 대표 제품인 핸드 크림 튜브를 닮았다. 부드럽게 연마된 표면에서는 균일한 빛이 뿜어져 나온다. 사진 이솝

이솝의 조명은 브랜드의 대표 제품인 핸드 크림 튜브를 닮았다. 부드럽게 연마된 표면에서는 균일한 빛이 뿜어져 나온다. 사진 이솝


특히 SNS 시대에 소비자들은 자신의 취향과 라이프스타일을 공간에서 표현하고 공유한다. 그리고 공간의 분위기를 결정하는 가장 강력한 요소가 바로 빛이다. 결국 브랜드가 조명에 집중하는 이유는 단순한 리빙 시장 진출이 아니다. 브랜드의 감각과 철학, 존재감을 소비자의 일상 공간 속으로 스며들게 하기 위해서다.


b.이슈
비크닉이 흘러가는 유행 속에서 의미 있는 이슈를 건져 올립니다. 사람들의 발길을 이끄는 매력적인 공간을 탐색하고, 시대와 호흡해 성장하는 브랜드와 기업을 조명합니다. 비즈니스적 관점은 물론, 나아가 삶의 운용에 있어 유의미한 ‘인사이트’를 전합니다.



이소진([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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