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4일 일본 제과회사 카루비는 이란전쟁발 글로벌 나프타 부족 사태로 주력 상품 포장을 흑백으로 바꿨다. [AP=연합뉴스]
일본 제과회사 카루비는 주력 상품 포장을 흑백으로 바꿨고, 닛신제분 웰나는 스파게티 패키지의 조리 시간 표기를 지웠다. 카고메 역시 케첩 외포장의 일러스트를 축소했다. 이 현상의 배경에는 이란전쟁으로 촉발된 글로벌 나프타 부족 사태가 있다. 포장재·잉크·접착제의 핵심 원료인 나프타 공급망이 붕괴하자, 일본 기업들이 제조 안정성 저하와 비용 상승이라는 직격탄을 맞은 것이다. 과자봉지 하나 제대로 인쇄하지 못하는 이 생경한 풍경은 에너지 자원이 빈약한 일본 경제의 본질적 취약성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그리고 이 실존적 안보 위기감은 역설적으로 일본 원전 부활의 속도를 당기는 강력한 명분이 되고 있다.
후쿠시마 사고 전까지 일본은 세계 3위의 원전 대국이었다. 자원 빈국인 일본에 원전은 준(準)국산 에너지였고, 정부는 여기에 국가적 총력을 기울였다. 2010년 기준 54기의 원자로가 전체 전력의 30%를 책임졌으며, 2006년 국가에너지전략에서는 2030년까지 이 비중을 50% 이상으로 끌어올리겠다는 이른바 ‘원자력 입국’을 선언하기도 했다. 정치권·경제산업성·전력회사의 유착 구조인 ‘원자력 무라(원자력 마피아)’는 규제와 진흥을 독점한 채 원전의 경제성과 안전성을 시장에 주입했다.
일본, 원유 90% 이상을 중동에 의존 2011년 3월 동일본대지진과 후쿠시마 제1원전 사고는 이 기조를 단숨에 무너뜨렸다. 여론의 거센 반발에 직면한 민주당 정권은 원전 가동을 순차적으로 중단시켰고, 2012년 5월 일본은 ‘가동 원전 제로’ 상태에 이르렀다. 제도적 개혁도 뒤따랐다. 유착 논란의 중심에 있던 원자력안전·보안원을 해체하는 대신 독립성을 강화한 원자력규제위원회를 신설했다. 세계 최고 수준의 까다로운 안전 기준이 도입되면서, 이를 통과하지 못한 원전들의 재가동은 무기한 연기되었다.
하지만 원전의 빈자리를 LNG와 석탄이 급히 메우면서 화력 발전 비중이 단숨에 80%를 넘어섰고, 이는 곧장 일본 경제의 구조적 부메랑이 되었다. 화석연료 수입 비용이 폭증하자 수십 년간 탄탄했던 무역수지는 대규모 적자로 돌아섰고, 전기요금 폭등으로 이어지며 민생과 산업 전반을 압박했다.
2012년 말 재집권한 아베 신조 총리는 ‘원전 제로’ 방침을 폐기하고 원전재가동에 착수했다. 2015년 8월 센다이 원전 1호기가 강화된 안전 기준을 처음으로 통과해 가동되면서 원전 공백기는 마침내 종식되었다. 다만 당시 아베 정부는 신설·증설이나 수명 연장 같은 민감한 의제는 비껴갔다. 안전성이 확인된 기존 원전만 재가동한다는 방어적인 스탠스였다.
기시다 후미오 내각에 이르러 이 금기가 전면 해제되었다. 기시다 총리는 2022년 8월 ‘탈탄소(GX) 실행회의’에서 차세대 원전 개발과 건설 검토를 전격 지시했고, 그해 12월 원전 정책의 패러다임 전환을 선언했다. ‘원전 의존도를 가능한 한 낮춘다’던 기존 국가 기조가, 탈탄소와 에너지 안보를 위해 ‘원전을 최대한 활용한다’로 180도 뒤집힌 순간이었다.
이러한 정책 복귀 배경에는 세 가지 거시경제적 위기가 맞물려 있다. 첫째, 글로벌 에너지 위기와 탈탄소(GX)의 압박이다. 2022년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으로 화석연료 가격이 폭등하자 전력 대란이 현실화되었다. 2050 탄소중립 과제 속에서, 산악 지형 탓에 재생에너지 확대가 제한적인 일본에 원전은 기저전력(베이스로드)을 책임질 가장 현실적인 대안이었다.
둘째, AI 전환과 첨단 반도체 공장이 유발한 전력 수요의 폭증이다. 수도권에 AI 데이터센터 건설이 급증하고, 홋카이도에는 반도체 부활에 일본의 사활이 걸린 라피더스(Rapidus) 공장이 들어섰다. 24시간 중단 없이 대규모 전력을 소모하는 첨단 산업의 특성상, 기후에 따라 발전량이 널뛰는 재생에너지만으로는 이 막대한 수요를 감당할 수 없다.
셋째, 중동발 지경학적 위기와 에너지 안보의 취약성이다. 원유의 90% 이상을 중동에 의존하는 일본에 호르무즈 해협 봉쇄 등 공급망 차질은 치명적이다. 용이한 우라늄 기반의 원전은, 일본의 에너지 주권을 지킬 사실상의 ‘국산 안보 수단’으로 재평가받고 있다.
그 결과물이 2023년 5월 국회를 통과한 ‘GX탈탄소 전원법’이다. 이 법은 원전 수명 규제 권한을 안전규제기관인 원자력규제위원회에서 원전 진흥 부처인 경제산업성으로 이관시켰다. 아울러 ‘원칙 40년, 연장 20년’이라는 기존 골격은 두되, 안전 심사나 사법부의 가처분 명령 등으로 멈춰 섰던 기간을 전체 운전 기간에서 제외할 수 있도록 조치했다. 규제에 묶여 허비한 세월을 고스란히 보상해 줌으로써, 실질 가동 수명을 60년을 넘어 사실상 70~80년까지 늘릴 수 있도록 제도를 개편한 것이다.
일본 가시와자키-가리와 원전. 7기의 원자로가 설치되어 있으며, 합계 출력 821만2000㎾로 세계 최대 규모 원전이다. [사진 도쿄전력 홈페이지]
제도적 빗장이 풀렸음에도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정부는 2030년까지 원전 비중을 20~22%로 올리겠다는 목표를 고수하고 있지만, 실제 상업 운전 중인 원전은 12기 안팎에 머물러 있다. 세계 최대 규모의 가시와자키-가리와 원전 등 핵심 원전들이 안전 심사와 지자체 동의라는 최종 관문에서 난항을 겪고 있기 때문이다.
에너지 안보, 이념 아닌 일상과 직결 가장 치명적인 문제는 10년이 넘는 공백기 동안 원자력 공급망과 인력 생태계가 붕괴했다는 점이다. 부품만 1000만 개에 달하는 원전은 건설이 멈추면 생태계가 고사한다. 과거 국산화율 90%를 자랑하던 미쓰비시·도시바·히타치 등 3대 플랜트 기업의 하청망은 신규 건설 중단으로 버티지 못했다. 이미 부품사 수십 곳이 도산하거나 업종을 전환했고 전문 인력도 급감했다. 이 하청망 와해는 재가동과 유지보수마저 삐걱거리게 만드는 부메랑이 되었다. 위기감을 느낀 경제산업성이 주요 플랜트 기업의 공급망 복원을 국책 과제로 선정해 대규모 재정 지원에 나선 이유다.
일본 정부와 업계는 공급망과 인력 생태계를 지키기 위해 과거 터키·영국·베트남 등지에 대형 원전 일괄 수주(EPC) 수출을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후쿠시마 사고 이후 안전 기준 강화로 비용이 폭증했고, 도시바는 미국 웨스팅하우스 인수 후 현지 건설 지연과 손실로 파산 위기에 몰렸다. 여기에 국가 금융 지원을 앞세운 러시아와 중국이 시장을 장악하자, 민간 금융에 의존하던 일본의 수출 경쟁력은 무력화되었다.
이후 일본 정부와 플랜트 업계는 전략을 대대적으로 수정했다. 공급망과 원자로 핵심 제조 기술을 지키기 위해 미·일 동맹을 활용한 ‘우회 전략’과 ‘차세대 원전 공동 개발’로 선회한 것이다. 빌 게이츠가 설립한 미국 테라파워(TerraPower)의 소형모듈원자로(SMR) 프로젝트에 일본 원자력연구개발기구(JAEA)와 미쓰비시중공업이 핵심 파트너로 참여한 것이 대표적인 사례다.
또한 히타치는 미국 GE와의 합작사를 통해 캐나다 온타리오 전력공사의 SMR 노형 공급자로 선정되었다. 과거 대형 원전 시절의 단독 수출이라는 고집을 버리고, 미국 공급망의 핵심 일원으로 합류해 확실한 실리를 택한 것이다. 특히 일본 기업들의 대미 투자 흐름 속에서 단행된 GE-히타치의 SMR 공급망 부문 집중 투자는 매우 상징적이다. 미국 현지 가치사슬 내에 깊숙이 안착하려는 이 과감한 자본 투입을 통해, 미·일의 원전 기술 연대는 더욱 공고해지고 있다.
여기에 더해 일본은 원전의 핵심 뼈대를 만드는 소재·단품 시장에서 독점적 지위를 유지하는 전략을 병행하고 있다. 원전의 심장인 ‘원자로 압력용기(RPV)’를 용접선 없이 단일 주조로 찍어낼 수 있는 초대형 프레스 기기를 보유한 나라는 전 세계에 일본을 비롯해 프랑스·러시아·중국 등 단 몇 개국에 불과하다. 특히 글로벌 대형 압력용기 단조 시장에서 일본 기업이 압도적인 점유율을 차지하고 있다 보니, 세계 어디서 원전을 짓든 일본산 핵심 부품을 사 갈 수밖에 없는 공급망 구조가 형성된다.
일본이 마주한 구조적 딜레마는 결코 남의 일이 아니다. 자원 빈국이자 제조업 강국이라는 특성, AI와 반도체 패권을 둘러싼 전력 확보 경쟁, 원전을 향한 극심한 사회적 갈등까지 한국은 일본과 놀라울 정도로 닮은꼴이다. 탈원전과 친원전 사이를 격렬하게 오간 끝에, 이재명 정부는 결국 신규 원전 2기 건설 계획을 원안대로 확정했다. 정부가 진영의 명분 대신 실리를 택한 것은 결국 생존이라는 냉혹한 현실 앞에서의 결단이었다. 에너지 안보는 이념의 전쟁터가 아니라, 문명을 지탱하는 일상의 인프라이기 때문이다.
이창민 한국외대 국제지역대학원 교수. 한(고려대)·일(도쿄대)에서 경제학을 전공한 일본학 3세대 학자. 도쿄공업대 교수를 거쳐 2014년부터 한국외대에서 재직 중이다. 『지금 다시, 일본 정독』 『아베노믹스와 저온호황』 『제도와 조직의 경제사』 등의 저서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