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워싱턴 DC를 방문 중인 쿠팡 김범석 의장이 지난 1월 17일(현지시간)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 당선인 취임식 전 비공개 리셉션에 참석해 트럼프 행정부 2기 내각의 주요 인사들과 트럼프 측 인사들을 만났다. 김 의장이 트럼프 당선인 장남인 도널드 트럼프 주니어와 함께 포즈를 취하고 있다. 연합뉴스
" 결국 쿠팡이었다. "
한·미 사정에 밝은 여권 고위 관계자는 29일 수개월간 공전한 양국 간 안보 협상의 교착 원인을 주저 없이 이렇게 지목했다. 뜻밖의 암초로 멈춰 섰던 한·미 안보 협상이 다음 달 2일 앨리슨 후커 미 국무부 정무차관이 이끄는 범정부 안보 협상팀의 방한을 기점으로 극적인 재개 수순을 밟는다. 이번 방한은 미 국무부의 외교력이 중동 사태에 쏠린 가운데 성사돼 그 배경에 정치권과 외교가의 관심이 쏠렸다.
당초 정부는 지난해 11월 한·미 정상 간 합의물인 ‘조인트 팩트시트’(Joint Fact Sheet)에 핵추진 잠수함(핵잠) 도입, 우라늄 농축 및 사용 후 핵연료 재처리 권한 확대 등 핵심 안보 현안을 담은 뒤, 지난 2월 미국 측 협상팀의 방한을 통해 후속 논의를 이어갈 계획이었다. 하지만 협상의 바퀴는 계속 겉돌았다.
초기 지연 사유는 지난 1월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의 관세 재인상 경고와 맞물린 대미투자특별법의 국회 처리 지연이었다. 그러나 이 법안이 지난 3월 중순 국회 본회의를 통과한 이후에도 안보 협상의 문은 열리지 않았다.
한·미 관계를 덮친 2차 뇌관은 쿠팡이었다. 쿠팡이 양국 간 민감한 현안으로 돌출한 것은 지난 1월 김민석 국무총리의 방미 당시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JD 밴스 미 부통령이 김 총리와의 면담에서 쿠팡 등 미국 기업에 대한 한국 정부의 차별 의혹을 언급했다. 미 고위급 인사가 특정 기업명을 직접 거론한 이례적인 상황이었지만, 당시엔 사안의 휘발성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했다는 평가가 나온다.
그 사이 쿠팡은 자사의 사법리스크를 동맹국 간 통상 이슈로 비화하기 위해 전방위적 로비전을 폈다. 지난 1분기에만 직전 분기 대비 87.9% 증가한 109만달러를 대미 로비에 쏟아부으며 미국 정부와 의회를 두루 접촉했다. 당시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과 가까운 미 조야 인사는 중앙일보에 “미국 의회에서 쿠팡 손이 안 닿은 사람이 없다고 봐야 한다”며 “한국이 이를 일개 기업 문제로 볼 상황이 결코 아니다”라고 전했다.
위성락 청와대 국가안보실장이 13일 오후 서울 중구 한국프레스센터에서 열린 한국신문방송편집인협회 초청 간담회에 참석해 생각에 잠겨 있다. 뉴스1
갈등이 정점에 달했던 건 지난달이다. 미국 측은 김범석 쿠팡Inc 이사회 의장의 법적 안전 문제를 외교·안보 고위급 협의와 직접 연계하고 나섰다. 지난달 말 정연두 외교부 외교전략정보본부장이 방미했지만 안보 후속 협의 일정을 확정하지 못한 채 발길을 돌려야 했다.
악화일로의 상황에서 정부 외교·안보 라인은 통상과 안보 이슈를 분리해 대응하는 투트랙 전략으로 대미 설득에 매달렸다. 지난 2월 방한한 마이클 니드햄 국무부 고문과 면담을 시작으로 3월 마이클 디솜브레 미 국무부 동아태 차관보 면담, 4월 사라 로저스 미 공공외교 담당 차관 및 상원 의원단 방한, 지난 11일 안규백 국방부 장관의 방미 등 릴레이 고위급 접촉이 이어졌다. 특히 위성락 국가안보실장은 지난달 23일 베트남 하노이 기자간담회에서 “쿠팡 문제가 안보 협의 지연에 영향을 주고 있는 것이 사실”이라고 공개 시인하며 안보 협상이 통상 현안으로부터 분리돼야 한단 시그널을 미국 측에 발신했다.
여권 관계자는 “고위급 만남에서 미 인사들이 쿠팡 문제를 빠짐없이 입에 올렸다”면서도 “미국 측에 한 번, 두 번, 세 번 거듭 말하니 결국 통상과 안보를 분리해야 한다는 우리 정부 논리가 먹혔다”고 설명했다.
박윤주 외교부 1차관(왼쪽)과 앨리슨 후커 미국 국무부 정무차관이 19일(현지시간) 미 워싱턴DC 국무부 청사에서 회담에 앞서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연합뉴스
이런 물밑 노력은 지난 18~21일 박윤주 외교부 1차관의 방미를 계기로 결실을 거뒀다. 박 차관은 후커 차관과 만나 안보 분야 후속 조치 협의를 위한 킥오프 회의 개최에 합의하며 파열음을 일단락했다. 백악관 아시아 담당 선임보좌관 출신인 후커 차관은 대북 문제와 한국의 안보 문제에 대한 이해가 높은 인사로 꼽힌다.
다만 안심하기엔 이르단 지적도 있다. 익명을 원한 소식통은 “중량급 인사의 방한은 한국에 대한 외교적 성의 표시”라면서도 “구체적인 현안 진전 없이 성의 표시만으로 마무리될 수 있다는 우려도 상존해 정부의 노력이 계속 이어져야 할 것”이라고 했다.